5월과 6월 물가 상승률이 2.6%와 2.4%를 기록했을 때도 '약속의 3분기'를 되뇌었다. 그리고 3분기의 첫달인 7월이 됐다. 물가 상승률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8월까지 5개월 연속 2%대가 이어졌다. 결국 9월말이 돼서야 정부는 말을 바꿨다.
물가 안정 시기 "3분기→내년" 말바꾼 정부
기재부는 지난달 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열고 "공급측 요인의 영향이 점차 줄어들고 상방압력이 다소 둔화되는 내년에는 금년보다 물가상승률이 낮아질 전망"이라고 밝혔다. 3분기 물가안정이 사실상 물건너 간 상황에서 물가안정 시기를 다음 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이후로 미뤄 제시한 것이다. 물가안정 목표 달성을 다음 정부로 떠넘긴 셈이다.문제는 정부가 내년 물가상승률이 안정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우선 정부는 각종 공공요금 인상을 내년으로 미뤘다. 기재부는 물가관계차관회의에서 인상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각종 공공요금을 연말까지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가스공사는 원료 가격 상승을 이유로 11월 도시가스요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다. 지자체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도 자제를 요청했다.
요금 인상이 당장 없다고 해서 요금 인상요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위적으로 멈춰놓았던 요금 인상이 내년 잇따라 현실화되면 물가는 더 급격하게 오르고 국민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농축산물 물가도 불안한 상황이다. 정부는 7000원대였던 계란값을 6000원대 중반으로 낮췄다며 안정세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낮아진 가격은 아직 작년보다 10% 이상 높은 수준이다. 게다가 10월들어 철새 도래시기로 접어들면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출 감축도 연금 개혁도 "다음정부로"
문재인 정부가 쉽지 않은 과제를 다음 정부 이후로 떠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출감축 목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 발표와 함께 내놓은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내년 이후 지출 증가율을 문재인 정부의 5년에 비해 크게 낮게 설정했다. 2025년 총지출은 올해 본예산보다 86조7000억원 증가한 691조1000억원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내년 이후 3년간 연평균 총지출 증가율을 4.6%로 설정해 계산한 것이다. 연평균 지출 증가폭은 28조9000억원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5년간 펼친 확장재정에 비해 지출 증가폭이 크게 줄어들도록 짠 것이다. 문 정부는 처음 예산안을 편성한 2018년 지출을 7.1% 늘린 것을 시작으로 2019년 9.5%, 2020년 9.1%, 올해 8.9% 등 총지출을 매년 큰 폭으로 늘렸다. 내년 지출 증가율 8.3%까지 감안한 5년간의 연평균 지출증가율은 8.5%에 이른다.
문재인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고 쓰게 될 2022년 예산안까지는 높은 지출 증가율과 증가폭을 허용하고, 다음 정부에서 예산을 짜는 2023년 예산부터는 증가율을 줄이도록 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마련한 재정준칙도 1년째 표류중이다.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국회를 통과할지 알 수 없다.
연금개혁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 등 4대연금은 5년마다 재정계산을 통해 현황을 파악한 후 개선책을 내놓아야한다. 연금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면 현재 9%인 연금보험료율을 인상하거나, 소득 대체율을 줄여 지급액을 낮추는 등의 연금 개혁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지급 시작 연령을 높일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8년 국민연금 재정계산에서 국민연금 재정이 2042년 적자로 전환된다고 예상했다. 2057년엔 기금이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같은 재정계산 이후에 제도를 바꾼 것은 없다.
연금보험료율을 현재 9%에서 12~13%로 높이거나,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만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방안 등 4가지 개혁안을 난잡하게 제시한 후 국회로 공을 넘긴 것뿐이다. 정부의 단일안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관련 논의가 완전히 중단됐다.
다음 재정계산은 지난 2018년으로부터 5년 후인 2023년 이뤄진다. 다음 정부의 출범 이후다.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과제 마저 다음 정부에게 넘긴 셈이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