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송유관 해킹 사고로 미국 남동부에서 벌어졌던 주유 대란이 4개월 만에 영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이주 노동자가 급감한 탓에 유조차를 운전할 운전사가 턱없이 부족해지면서다. 영국 정부는 군인을 트럭 운전사로 동원하기 위해 훈련하는 등 비상 대응에 나섰다.
28일 영국주유소협회에 따르면 현지 주유소 중 50~90%가량이 기름 탱크를 채우지 못한 상태다. 영국에 등록된 주유소는 8000여 개다. 브라이언 매더슨 주유소협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패닉 바잉(공황적 구매)이 잇따르면서 기름이 고갈되는 속도가 운반되는 속도보다 빠르다”고 전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가격은 요동쳤다. 영국 차량서비스 회사 RAC에 따르면 26일 기준 영국 휘발유값은 L당 1.37파운드로 2013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이먼 윌리엄스 RAC 대변인은 “유가가 상승하면서 도매 가격까지 오르고 있다”며 “소매업체들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공급난과 상관없이 가격은 더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 확산 후 미국과 유럽을 덮쳤던 공급난은 영국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소비 수요가 급증하면서 물류량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트럭 운전사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영국에서 자국으로 돌아간 유럽연합(EU) 소속 트럭 운전사는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같은 기간 운행을 멈춘 영국인 트럭 운전사도 5만 명에 이른다. 극심한 인력난은 결국 유조차까지 멈춰 세웠다. 공급망 부족 경고등을 울린 것은 대형 주유소 체인들이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지난 23일 영국의 1200개 직영 주유소 중 10~15%가 기름 고갈로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다.
기름이 동날 것이란 경고가 퍼지자 소비자들이 앞다퉈 주유소로 몰렸다. ‘패닉 바잉’은 주유난에 기름을 부었다. 불안 심리를 다독이기 위해 정부가 나섰다. 폴 스컬리 영국 중소기업부 장관은 영국병으로 시름하던 1970년대 같은 ‘불만의 겨울’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최대 1만 명의 외국인 근로자에게 임시비자를 내주도록 했다. 첫 임시비자 발급 대상은 트럭 운전사 5000명이다. 사실상 브렉시트 정책의 과오를 인정한 것으로 정치적 부담이 큰 결정이었다. 하지만 주유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사태가 악화하자 의료계까지 비상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국의학협회는 기름이 떨어져 구급차를 운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택배회사들은 직원들에게 배달을 멈추고 집에 머무르라고 통보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7일 추가 대책을 내놨다. 육군 탱크부대 소속 군인을 유조차 운전사로 배치하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