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록(gridlock·교착상태).’ 미국의 대선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판세를 분석하는 월가 리포트에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다. 골드만삭스 등 대형 IB(투자은행)는 물론 월가 ‘투자 구루’들의 전망도 가세한다. 비싼 돈을 들여 경합지역의 지지율을 직접 조사하는 투자회사들도 적지 않다.
월가의 분석은 대개 이렇게 정리된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리드록’에 갇힐 것이다. 시장으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그리드록은 대통령의 소속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달라 새로운 법안이나 정책을 일방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정치용어다.
시장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정치적 무기력 상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집권 초기 무리한 결정으로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고 투자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안정된 경제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정치 권력이 약화될수록 경제에는 긍정적”이라는 분석도 빠지지 않는다.
그리드록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초 미국의 정치구조가 설계될 때부터 내재화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시장의 관여는 한국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강력한 대통령제라는 권력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국의 선거 캠페인과 달리 한국선 선거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정치 리스크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기업들이 원치 않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는 경우가 단적인 예다. 무엇보다 유력 대선후보들의 기업 현장 방문이 많아진다. 정권 초기 총수들을 불러세워 ‘개혁의 대상’임을 각인시키다가 후반기엔 국가 경영자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업을 끌어들이는 모습이다.
올해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이 ‘핫 스폿’이 됐다. ‘삼성 저격수’로 불렸던 더불어민주당 예비 대선주자 박용진 의원은 지난 6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삼성 지킴이’를 자처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도 한 달 뒤 화성캠퍼스를 찾았다. “삼성전자의 노력 덕분에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한 달 뒤인 8월에는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이 평택공장을 찾아 ‘삼성전자의 성공 신화는 전 국민의 자랑입니다’라는 글귀를 방명록에 남겼다. 같은 당 홍준표 예비후보도 최근 삼성전자를 방문해 “국가가 지금처럼 기업에 갑질을 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유력 대선주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앞다퉈 기업을 찾지만, 정작 기업 공약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여야 모두 당내 경선이 한창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제대로 된 산업정책 방향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규제합리화, 혁신적 투자국가 등의 미사여구가 등장할 뿐 정작 ‘어떻게(how)’는 없다.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를 ‘깜깜이 선거’로 뽑는 셈이다. 기업들도 산업 현장이 정치이벤트 용도로 쓰이는 걸 원치 않지만, 속으론 손사래를 칠 뿐 막을 방법이 없다.
2017년 3월 대한상공회의소는 19대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하는 제언’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기업들이 원하는 ‘위시리스트(희망사항)’가 아니라, 경제 아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고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상의는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고 미래번영의 틀을 짜기 위한 ‘경제 밑그림’을 보여달라”고 제언했다.
다시 정치의 시즌이다. 5년마다 되풀이되는 정치 리스크에 기업들은 또 한 번 숨을 죽이고 있다. 최근 만난 경제계 관계자는 “정쟁에 몰입해 ‘선명성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책의 안정성이 유지되고, 미래 예측가능성이 높아져야 투자와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경제가 정치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정치 시계가 빨리 돌아갈수록 불안정과 리스크가 커지는 과거가 20대 대선에선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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