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9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통화 정책 회의를 연 결과 현행 0%인 기준금리를 동결하되 채권 매입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ECB의 기준금리는 제로 수준을 유지하게 됐다. 시장 예상대로다. 예금금리와 한계대출금리 역시 각각 연 -0.50%와 0.25%에서 바뀌지 않는다.
다만 작년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충격 직후 도입한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의 채권 매입 속도를 올해 1~2분기보다 늦추기로 했다. 최소한 내년 3월 말까지 1조8500억달러의 채권을 매입한다는 큰 틀은 유지하되, 매달 사들이는 채권 규모를 줄이겠다는 의미다.
라가르드 총재는 “유럽 내 자금 조달 여건과 물가 전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채권 매입 속도를 지난 2개 분기보다 다소(moderately) 늦추더라도 우호적인 금융 여건이 조성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ECB는 올해 1~2분기에 매달 800억유로씩 채권을 매입했는데, 향후 월 600억~700억유로 수준으로 매입 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는 게 로이터통신의 설명이다.
앞서 ECB는 지난 3월 델타 변이 확산 등의 영향으로 채권 매입 속도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 이후 6개월 만에 정책을 수정한 것이다.
라가르드 총재는 “유로 지역 경제는 분명히 반등하고 있다”며 “2분기 2.2% 성장한 데 이어 3분기에도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럽 성인의 70% 이상이 백신 접종을 마친 게 영향을 끼쳤다”며 “다만 추가 회복 속도는 감염 확산 및 백신 접종 상황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ECB는 목표물장기대출프로그램(TLTROⅢ)을 통한 유동성 공급을 지속하고 자산매입프로그램(APP)도 월 200억유로 규모로 유지하기로 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번 결정이 “자산 매입액을 줄이는 테이퍼링이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의 명언을 인용하며 “그 여성이 (테이퍼링으로) 돌아선 게 아니다(The lady’s not for turning)”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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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 총재가 테이퍼링에 대해 선을 그렀지만, 시장에선 ECB가 사실상 긴축 전환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채권 매입 시기를 늦춘 건 매입액 자체를 줄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란 얘기다.
특히 유럽 내 물가가 급등세를 타고 있어 ECB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로를 사용하는 유로존 19개 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달 3%(작년 동기 대비) 급등해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 물가는 28년만의 최고인 3.9% 치솟았다.
ECB는 올해 유로존의 성장 전망을 종전 4.6%에서 5%로 상향 조정했다. 내년 성장률은 4.7%에서 4.6%로 0.1%포인트 낮췄다.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은 연말 2.2%, 내년에 1.7%, 2023년에는 1.4%를 각각 기록할 것이라고 봤다. 올해 말의 물가 전망은 종전 대비 0.3%포인트 높은 수치다.
현재 ECB가 정해놓은 물가상승률 관리 목표치는 2%다. 종전 목표치가 ‘2% 바로 아래’였는데 최근 2%로 18년 만에 상향 조정했다.
투자회사인 프린시펄 글로벌 인베스터스의 시마 샤 수석전략가는 “이번 ECB의 조치는 테이퍼링을 향한 의미있는 행보”라며 “미 중앙은행(Fed)의 테이퍼링 속도에 맞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ECB가 테이퍼링을 향한 첫 발을 내디디면서 미 Fed의 조기 긴축 움직임을 강화시켜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날 유럽의 주요 증시는 혼조세로 마감했다.
프랑스 CAC40지수는 0.24% 오른 6,684.72, 독일 DAX지수는 0.08% 상승한 15,623.15로 거래를 마쳤다. 반면 영국 FTSE100지수는 1.01% 내린 7,024.21, 범유럽 지수인 유로스톡스50지수도 0.04포인트 내린 4,177.11로 각각 장을 마쳤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