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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인공지능'은 'AI'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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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이목을 끌었던 인간 대 인공지능(AI) 간 반상 대결이 펼쳐진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맞붙은 이 대국은 우리 사회에 ‘AI 쇼크’를 불러왔다. 동시에 우리말에는 ‘AI’란 영문약자의 위세를 한껏 떨쳐낸 계기가 됐다.
AI는 인공지능·조류인플루엔자 두 가지 뜻
우리말 가운데 ‘말 대(對) 말’ 세력싸움으로 주목할 만한 것에 ‘AI(artificial intelligence)’와 ‘인공지능’을 빼놓을 수 없다. 둘 간의 판세가 팽팽하다. 보통은 효율성을 따져 영문약자를 선호하는데 이들 사이는 특이하다. 그 배경에는 AI가 두 가지로 쓰인다는 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과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가 그것이다.

애초에는 조류인플루엔자로서의 AI가 인공지능으로서의 AI보다 더 많이 쓰였다. 이 말이 본격적으로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97년께다. 초기에는 ‘조류독감’으로 불렸다. 이후 독감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어감이 가금(家禽: 닭 오리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 산업에 타격을 준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따라 대체어로 나온 게 ‘조류인플루엔자(AI)’였다. 완곡어법 효과를 노린 용어인 셈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인공지능으로서의 AI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그런 두 가지 용도로 인한 헷갈림(?) 때문인지는 몰라도 외래어 ‘AI’와 함께 우리말 ‘인공지능’도 꽤 자주 쓰인다. ‘이메일’의 벽을 넘지 못한 ‘전자우편’과 달리 ‘인공지능’이 ‘AI’를 밀어내고 단어로서의 위상을 굳힐지 귀추가 주목된다.
영문약어 대응해 우리말 약어 키워야
경제 성장, 개발도상국 원조 등을 목적으로 1961년 창설된 국제기구가 있다. 우리나라도 1996년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바로 ‘OECD’다. 이를 ‘오이시디’ 또는 ‘경제협력개발기구’로도 쓴다. 둘 다 같은 말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다. OECD는 우리 글자가 아니라 사전에 오르진 못했다. 하지만 셋 중 가장 많이 쓰인다. 왜일까?

OECD는 말할 때와 달리 글에서 ‘오이시디’로 잘 쓰지 않는다. 두문자 말이기 때문에 단어화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경제협력개발기구’라고만 하지도 않는다. 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즉 한글 명칭 뒤에 영문약어를 덧붙이는 식이다. 한 번 이렇게 표기한 뒤에는 주로 OECD라고 적는다. 한글 ‘오이시디’는 암호 같고, ‘경제협력개발기구’는 너무 길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OECD’는 본래의 고유명칭인 데다 세계적으로도 통하는 말이라 표기 자체로 경쟁력이 있다. 언론에서 쓰는 영문약어는 대부분 이런 내부 심의 절차를 거친 표기 방식에 따른 것이다.

우리말에서 영문약어의 존재는 위력적이다. 전 세계에 퍼진 영어의 강력한 지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경제성’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말 중에서도 정식명칭보다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게 많다. 가령 민주노총, 전경련, 대한상의, 전교조, 합참의장 등은 줄임말이 더 익숙하다. 민주노총이라고 하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라고는 잘 쓰지 않는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약어를 잘 쓰면 정식명칭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다.

넘쳐나는 영문약어에 대응하려면 좋은 우리말 약어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이른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류의 조어들이 자꾸 늘어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다. 줄임말이 주는 효율성에, ‘언어적 일탈’에서 오는 긴장감, 그로 인한 강렬한 메시지 효과 같은 걸 잘 버무려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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