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은 오세정 서울대 총장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서울대가 지주회사인 SNU홀딩스 법인을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서울대 동문으로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비슷한 시기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 조용히 살고 싶다”는 권 전 회장의 고사에도 오 총장의 의지는 강했다.
끈질긴 요청에 권 전 회장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SNU홀딩스의 독립경영을 보장하고 최고의 전문가들로 이사회와 경영진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 총장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권 전 회장은 SNU홀딩스 추진위원회에 이름을 올렸고 이사회 의장까지 맡게 됐다.
최고 전문가로 ‘서울대 회생 프로젝트’
31일 서울대에 따르면 SNU홀딩스의 이사진은 의장을 맡은 권 전 회장을 포함해 7명으로 구성된다. 서울대 관계자는 김용진 기획처장과 강준호 사범대 교수 등 2명으로 나머지 5명은 모두 산업계와 금융계를 대표하는 외부 전문가로 꾸려졌다.이사진에는 국내 대표적인 초기투자 전문 벤처캐피털(VC) 캡스톤파트너스의 송은강 대표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종합기술원 출신인 송 대표는 컬리, 직방, 당근마켓 등 유니콘 기업을 키워낸 VC업계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삼일PwC회계법인 부문 대표를 지낸 서동규 최고경영자(CEO) 역시 이사로 참여한다. 그는 20년 넘게 인수합병(M&A)을 비롯해 신사업 진출 등 기업들의 굵직한 사안에서 자문을 맡아온 투자 전문가다. 이사회 구성원은 아니지만 SNU홀딩스 설립 과정에 변대규 휴맥스홀딩스 회장, 황각규 전 롯데지주 부회장 등 산업계 거물도 참여했다.
산업(권오현), 벤처(송은강), 투자(서동규) 등 업계 스타들로 구성된 SNU홀딩스 이사회의 구성은 ‘변화’를 갈망하는 서울대의 의지와 초대 사령탑을 맡은 권 전 회장의 철학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서울대는 2011년 국립대의 틀에서 벗어나 법인으로 전환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해외 경쟁 대학에 비해 재정 규모는 물론 자립도도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법인 전환 후 수익 사업이 가능해졌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2016년 이후 5년간 서울대의 연간 총수입(약 8000억원)에서 수익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3% 안팎에 불과했다. 세금으로 조성된 정부출연금 비중이 여전히 54~58%에 달했다. ‘무늬만 법인화’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부실한 재정은 서울대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QS에 따르면 서울대의 대학순위는 2012년 37위에서 2020년 36위로 한 계단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아시아 순위는 4위에서 14위로 추락했다. 한때 도쿄대, 베이징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명성이 무색해진 셈이다.
‘창업→수익→재투자’ 선순환 구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대는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올 2월 지주회사 SNU홀딩스를 설립했다. 정부출연금과 등록금을 제외한 1000억~2000억원 규모의 수익 사업과 6000억원가량의 서울대 자산을 관리하는 회사로 서울대법인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SNU홀딩스의 핵심 기능은 서울대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한 창업과 투자다. 서울대는 작년 말 교원 창업 시 기업 지분 5%를 의무적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양도하도록 창업 규정을 고쳤다. SNU홀딩스는 투자 전문 자회사인 SNU벤처스를 설립해 매년 10~20개씩 생겨나는 교원 창업 기업의 지분을 관리하고 자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수익이 발생하면 이를 서울대법인으로 옮겨 교육·연구를 위해 쓰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겠다는 계획이다.
SNU홀딩스는 학내 특허와 부동산 등 인프라를 활용한 자체 수익 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서울, 강원 평창, 경기 시흥 등의 캠퍼스 인근 부지를 활용한 부동산 개발 등도 고려 중이다. 현재 60 대 26 대 14인 출연금·등록금·수익 비중을 2030년까지 50 대 25 대 25로 조정한다는 게 서울대 측의 계획이다.
황정환/박신영/김남영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