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대담’을 실었다. 대담자는 소설가 이호철 선생님과 나였다. 동아일보가 ‘분단문학’ 대가의 상대로 나를 고른 건 그해 4월 내가 통일 이후의 사회를 그린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을 출간해서였다. 1932년 원산 태생인 선생님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돼 포로가 됐다 풀려난 뒤 구사일생 고향에 돌아왔다가, 미군 상륙수송선을 타고 혈혈단신 월남한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이었다. 언젠가(‘언제든’) 있을 남북통일을 독일통일의 전후와 또박또박 비교 분석하는 내 태도를 ‘차갑게’ 여기셨던 건 필경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고가는 사람, 한솥밥 먹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통일의 시작이에요.” 그러며 선생님은 그걸 ‘한살림 통일’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내가 반통일주의자가 아니고 《국가의 사생활》이 반통일 소설이 아닌 게 분명한 마당에 나는 저 낭만적으로 모호한 바람에 동의할 순 없었다. 어둠을 직시해야 그 어둠을 뚫고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통일에 대한 ‘과학적이기에 비극적인 상상력’은 요긴하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통일 이후 벌어질 모든 상황들에 관한 정확한 시뮬레이션이 없으니, 당연히 대책도 비전도 없다. 있어봤자 착해빠진 황당한 희망사항들을 늘어놓거나 DMZ를 가지고 테마파크 놀이를 하는 수준이다. 이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다. 이대로라면 한반도 통일은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자연재난’의 외형을 지닐 것이다. 한국인들이 통일에 대한 생각 자체가 피곤해 무의식 안으로 지워버리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내가 ‘통일 대한민국’을 소설로 썼던 까닭은 남한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낯설게 성찰해봄으로써 그것들이 통일 이후 어떻게 변이확대돼 갖가지 증오와 폭력으로 창궐하게 될 것인지를 질문하고 싶어서였다. 통일은 대박이니 쪽박이니 하는 서툰 관념이 아니라, 희망보다 난해하고 절망보다 또렷한 ‘혼돈’일 것이라는 ‘현상(現象)’을 제시하고 싶어서였다. 뭐든 제대로 알고 준비를 해야 극복하고 치유하여 행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담이 끝난 후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서 선생님과 나는 이상하다 싶게 헤어지지 못하고 한참 마주 선 채로 얘기를 더 나누었다. 나는 대선배 대작가이신 선생님을 뵙게 돼 영광이라는 진심과 아까 대담에서의 내 입장을 부연함으로써 어떤 죄송함과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따뜻한 격려 끝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산천운명(山川運命)’이라는 게 있어. 전쟁, 분단, 실향, 뭐 그런 것들. 인간은 휘말려 떠내려가기 마련이지.”
멀어져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2016년 9월 18일, 선생님이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향년 85세. 그동안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를 썼던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작가 이호철의 글들과 인터뷰들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월남한 겁니다. 아니었다면 ‘독재타도’나 외치다 정치범 수용소에 갔겠죠. 북한은 문학도, 작가도 없어요. 그 독재가 무너져야만 분단도 무너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유’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게 민족의 품격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를 함부로 대하고 있어요.” “글 쓰는 사람은 목이나 어깨에 힘주지 않고, 자연스럽고 정직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래 못 가요.” “제 문학은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남북관계가 있는 한 계속 쓸거리가 있는 거예요. 작가로서 감사한 일이죠.”
처음 만나 영원히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이란 ‘완전한 이별’이다. 이 사회는 산 자들끼리의 대화가 지옥 같다. 날이 갈수록 나는 죽은 이들과의 대화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산천운명’과 싸워 이길 줄 아는 나라에 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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