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갓 넘긴 1990년 봄. 생애 첫 개인전을 대구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열었다. 인물화 위주의 전시였다. 카탈로그와 포스터는 지인의 도움을 받았고 액자는 반 이상을 직접 제작했다. 대관료는 전시가 끝난 뒤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전시회부터 열었다. 그림이라고는 팔아본 적이 없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게 1주일을 보냈다. 그 어두운 인물화, 우울한 풍경을 걸어놓고 그림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하게 말이다. 보다 못한 친구 몇 명이 그림을 사줘서 간신히 대관료와 액자비는 해결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무식하고 용감했다.
그즈음 나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카드’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알코올 분해효소였다. 무명이라는 말조차 고마운 시절이었으니 자신감은 땅바닥이 아니라 지하 수준이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고자 사회초년생인 친구들이 그림은 못 사고 술이라도 사주려고 왔다. 그때 나 자신도 놀란 그 비장의 무기를 처음 알았다.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했어도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리고 옛날 동네를 돌아다니던 약장수만큼이나 말도 잘하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그 친구들은 본의 아니게 ‘미래의 피카소’에 투자하는 셈 치라는 내 말을 믿고 험한 그림들을 하나씩 맡았다. 술을 사러 왔다가 그림을 사게 되는 구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그다음 전시회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내 그림은 점점 밝아졌고 친구들은 자진해서 사는 일이 늘었다. 그래서 가끔 인터뷰하게 되면 술과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첫 전시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럼 그 구도가 깨졌을까? 지금은 또 다른 친구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친구들은 그림을 사고 내가 술을 산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제도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사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런 배경에는 화가라는 직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벼슬이 아니라 단지 남다른 재주의 손을 가진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는, 그저 복 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된 때문이었다. 옛날에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줬으니 이제는 내가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고, 아름다운 기술(美術)을 가미해서 무성영화 시대 때의 변사처럼 심금을 울려줄 차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게 세상은 무성영화와 같고 나는 그 영화를 읽어주는 변사다. 그림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지라 이런 생각은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화실에 오래 머물러 감각이 둔해지는 날이면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영화 같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술잔을 앞에 놓고 그들의 사는 이야기·사랑 이야기를 잘 듣고, 다시 화실로 돌아와서는 변사가 돼 그 이야기에 색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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