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저음이 울리고 피아니스트 손열음(사진)의 오른손 검지가 떨렸다. 거센 타악기 소리를 내려고 강하게 건반을 내리친 탓이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손열음은 관악기의 거센 음과 현악기의 여린 음을 피아노 한 대로 풀어냈다. 지난 2일 저녁 강원 평창 알펜시아콘서트홀에서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메인 프로그램 중 하나로 열린 ‘산과 죽음’의 한 장면이다.
이날 공연은 일찌감치 클래식 애호가에게 주목받았다. 손열음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곡 중 하나인 ‘페트루슈카’를 피아노 독주로 풀어내고, 현대무용가 김설진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해서다. 음악제의 예술감독인 손열음은 지난 6월 기자간담회에서 “음악제의 절정으로 꼽는 공연”이라고 했다.
손열음은 부푼 기대만큼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피아노는 무대 뒤편을 향하도록 놓였고, 연주자는 관객을 등졌다. 통상 피아니스트는 관객을 마주보거나 옆모습이 보이도록 앉는다.
손열음은 무대 뒤의 거대한 칠판을 응시하며 연주를 시작했다. 양손을 교차해 화음을 뿜어냈다. 피아노와 칠판 사이로 김설진이 등장했다. 그는 피아노 박자에 맞춰 그라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김설진의 드로잉 퍼포먼스에 시선이 쏠리도록 연출한 것이다.
공연은 아널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선보인 2부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쇤베르크는 1912년 벨기에 시인 알베르 기로가 쓴 동명의 시에 노래를 붙였다. 화음은 없고, 불협화음이 약 45분 동안 이어진다. 음의 세기는 극단적으로 바뀌고, 반복되는 선율은 하나도 없다. 낯설고 기괴하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이처럼 까다로운 곡을 쉽게 전달했다. 성악곡을 1인극처럼 연기했다. 울먹이다 성을 내고 좌절했다. 곡소리처럼 특이한 발성법도 소화해냈다. 서예리의 노래에 맞춰 김설진은 광기 어린 춤사위를 펼쳤다.
지난해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된 리오 쿠오크만이 무대 흐름을 간결하게 이끌었다. 약 2분 길이의 성악곡 21개가 쉴 틈 없이 변주됐지만 분위기는 산만하지 않았다. 스베틀린 루세브(바이올린·비올라), 조성현(플루트·피콜로), 조인혁(클라리넷·베이스 클라리넷), 이진상(피아노), 김두민(첼로) 등 5명의 조화가 돋보였다. 독특한 연출과 과감한 선곡으로 클래식 공연의 새 길을 제시한 무대였다.
평창=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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