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권오설 선생 등 4명이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을 올해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발표했다.
이들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3·1운동 참가 이후 고향인 안동에서 학습강습소를 조직해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던 권오설 선생은 6·10만세운동의 모든 계획과 추진을 주도했고,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작성했다. 선생은 6·10만세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출옥을 며칠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이선호 선생은 1925년 9월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 창립 시 사업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25년 11월 임시집행부에도 선임됐다. 6·10만세운동에서 선생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여 명이 만세를 외치면서 격문서 약 1000여 장과 태극기 30여 매를 배포했다. 선생은 이후 법정에서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만세시위의 선봉에 나섰다”고 말했다. 선생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7년 9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일본 경찰에 수차례 붙잡힌 뒤 1933년 귀국했다.
박래원 선생은 1920년 천도교 청년회에서 천도교 청년동맹이 분리될 때 창립주역으로 활약했다. 선생은 인쇄직공 쪽과 청년·사상단체의 화요회 계열에서 활동하며 권오설 선생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천도교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권오설 선생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에 필요한 소형 인쇄기 2대와 용지, 활자, 기타 필수품을 구입해 인쇄 준비를 했고, 거사일이 임박해 격문 제작 자금이 없자 권동진 선생으로부터 흔쾌히 1만원의 자금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선생은 징역 3년형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동환 선생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무로 일대의 폭파 등을 제시하는 등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을 추구했다. 고향에서 부쳐온 생활비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고, 이선호 선생과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선생 등과 연락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했다. 그는 6월 10일 오후 2시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 선생 등과 함께 격문 700여 매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6·10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돼 중앙고보생 1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됐고, 경성복심법원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징역 1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앞서 정부는 이들 4명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오설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선호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박래원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이동환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문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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