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가격 하락은 이달 초부터 예고됐다. 세계 기관투자가들이 매도하기 위해 거래소로 입금한 비트코인이 갑자기 세 배 가까이 폭증했다. 반면 거래소로 유입된 신규 자금은 반토막 나기 시작했다. 비트코인을 사겠다는 개인투자자는 줄어드는 반면 큰손들이 빠르게 비트코인을 대규모로 매각하며 하락세가 시작된 것이다. 비트코인 상승에 베팅했던 선물까지 대거 청산되면서 하락세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하루평균 유입액 절반으로 ‘뚝’
24일 업계에 따르면 이달 1~3일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등 4개 암호화폐거래소에 새로 입금된 자금은 총 1조8000억원으로 집계됐다. 하루평균 6000억원으로 지난달 하루평균 입금액인 1조1066억원의 절반 수준이다. 올 들어 거래소에 신규 유입된 자금은 1월 6조9000억원, 2월 11조2000억원, 3월 16조7000억원, 4월 33조2000억원이었다.최근 들어 비트코인을 팔겠다는 큰손들의 매도 행렬이 이어졌다. 크립토퀀트에 따르면 24일 낮 12시까지 24시간 동안 세계 거래소에 유입된 비트코인 개수는 계좌당 평균 2.3개로 나타났다. 이날 하루에만 투자자 한 명이 비트코인 2개를 팔아치운 셈이다. 지난 13일 올 들어 처음 2개를 넘긴 이후 20일엔 계좌당 3.7개의 비트코인이 거래소에 들어오기도 했다. 주기영 크립토퀀트 대표는 “큰손들이 지속적으로 개인 전자지갑이나 기관 커스터디(수탁) 서비스에서 거래소로 비트코인을 전송해 매도하고 있다”며 “계좌당 비트코인 유입 개수가 2개를 넘어선 것은 지난 1년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암호화폐 투기 열풍이 불었던 2017년 말에는 12월 1일 계좌당 비트코인 유입 개수가 2.3개로 정점을 찍고 2주 뒤인 17일부터 급락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큰 선물 청산”
큰손들의 매도로 비트코인이 하락하자 가격 상승에 베팅한 선물이 순식간에 청산됐다. 선물 등 암호화폐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와 바이낸스 등의 거래소에서 적게는 0.5배, 많게는 125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할 수 있다. 100만원의 증거금으로 100배까지 레버리지를 설정하면 1% 상승했을 때 100만원의 수익을 낸다. 하지만 1% 떨어지면 100만원의 증거금 전액을 잃는 ‘마진콜’이 터진다. JP모간 암호화폐 분석팀은 이달 17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최근 CME에서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청산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기관들이 전통적인 가치 저장 수단인 금을 보유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빠르게 매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여기에 미국과 중국이 잇달아 규제안을 발표하면서 기름을 끼얹었다. 류허 중국 부총리는 21일 국무원 금융안정발전위원회에서 “비트코인 채굴과 거래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암호화폐가 조세 회피 목적으로 쓰이는 것을 막겠다며 1만달러 이상 암호화폐를 거래할 때 국세청(IRS) 신고를 의무화했다.
인플레이션에 조여드는 규제망
당분간 암호화폐 가격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미국 물가 상승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은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정할 때 고려하는 지표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예상보다 높은 4.2%였다. 오는 28일 발표되는 지난달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는 2008년 이후 가장 큰 폭인 3.5%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보다 더 오르면 금리 인상이 조기에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규제 이슈도 남아 있다. 다음달 3일부터 유럽중앙은행(ECB)은 모든 암호화폐거래소에 의심거래의 당국 신고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 심사 결과도 다음달 30일 발표되지만 허가 가능성에 물음표가 붙는 분위기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이 ‘암호화폐업계에 투자자 보호장치가 필요하다’며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권용진 비브릭 최고전략책임자(CSO)는 “올초부터 레버리지를 일으킨 투자자들이 누적돼왔는데 이번에 레버리지가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다시 연초 수준으로 돌아온 것”이라며 “여전히 레버리지가 남아 있는 데다 정부에서 긍정적인 규제 분위기를 내놓지 않으면 계속 내려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