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여당이 상정 3분 만에 통과시켰습니다.”(김정재 국민의힘 의원) “전문가 간담회를 연다는데 사전에 자료도 못 받았습니다.”(권은희 국민의당 의원)
국회에 쏟아지고 있는 제정법안을 여당이 제대로 된 심사절차도 거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통과시키고 있다. 공청회 절차를 요식행위로 처리하거나 숙려 기간을 생략하는 ‘꼼수’를 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졸속 입법의 피해가 결국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제정안 쏟아지는데
1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률 제정안은 총 549건이다. 국회가 열린 뒤 같은 기간 19대 국회(358건), 20대 국회(386건)에 비해 70%가량 늘었다. 제정안은 기존 법률을 수정하는 개정안에 비해 적용 범위부터 예외조항까지 따져야 할 내용이 많아 통상 더 꼼꼼한 심사가 필요하다. 문제는 여당이 처리 기한을 못박아두고 ‘속도전’으로 의결을 추진하면서 졸속으로 심사되는 법안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은 ‘옥상옥’ 논란이 있는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제정안을 교육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야당의 반발로 법안이 상임위를 넘지 못하자 지난 2월 민주당이 기습적으로 안건조정위에 회부한 것이다. 이후 90일간의 조정위 활동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심사마감 기한(5월 18일)이 다가오자 안건조정위 일정을 잡아 야당에 통보했다. 민주당은 회의에서 2시간42분 만에 심사를 마치고 국가교육위 제정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달 22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민주당 소속 소위원장인 강훈식 의원은 같은 당 홍익표 의원이 발의한 지역상권법 제정안을 상정하고 의결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가결됐다”고 선포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의결을 해야 한다”고 하자 강 의원은 뒤늦게 전문위원 설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전문위원이 법안 설명을 시작하자 강 의원은 “그 정도만, 짧게 해달라”라며 말을 끊고 바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상정한 지 3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회법상 절차도 무시
제정법 심사절차인 공청회를 요식행위로 치르거나 생략하는 일도 흔히 벌어지고 있다. 기업규제 3법 중 하나로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 제정안은 국회 본회의 의결 이틀 전에야 전문가 간담회가 열렸다. 야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불참한 가운데 전문가 두 명이 약 30분간 법안 내용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쳤다. “간담회는 여야 합의로 열어야 한다”(성일종 국민의힘 의원)는 등의 항의는 여당의 강행 속에 묻혔다.국회법상 정해져 있는 법제사법위원회 숙려기간(5일)도 무시됐다. 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은 새벽에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의결된 뒤 오전 법사위를 속전속결로 통과해 같은 날 오후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하루 만에 국회 심사절차인 상임위-법사위-본회의 심사를 모두 끝낸 것이다. 숙려기간은 의원들이 부실심사를 하지 않기 위해 법안 내용을 숙지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러나 21대 국회 들어 ‘긴급하고 불가피한 사유’가 있으면 생략할 수 있는 예외조항 적용이 남발되면서 유명무실화됐다.
“법 정합성 떨어져”
속전속결로 처리된 법안들에 대해선 벌써부터 수정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지난 1월 통과되자마자 산업계는 물론이고 여당에서조차 당장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해충돌방지법은 적용 범위를 두고 형평성 논란이 벌어지자 후속입법 여지를 부대의견으로 남기고 법안을 통과시켰다.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의 사회적 파급영향 분석 없이 입법을 하다 보니 법 간의 충돌이 일어나거나 정합성(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거 보수 정당이 200석을 넘겼을 때도 있었지만 이 정도의 입법독주는 없었다”며 “규제 입법 남발 등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