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위대한 화가는 다른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방식까지 바꾸는 사람들이다. 피카소처럼…. 데이비드 스웬슨은 투자 전문가들의 투자에 대한 생각을 바꿔놨다.”
미국 예일대 기금의 투자위원장을 지낸 찰스 엘리스는 지난 6일 암 투병 끝에 작고한 데이비드 스웬슨 예일대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이렇게 평했다.
워런 버핏만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웬슨이 자산운용업계에 남긴 유산은 결코 버핏에 뒤지지 않는다. 운용 업계 종사자들은 버핏보다 스웬슨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쓴 책 ?포트폴리오 성공 운용?은 전 세계 CIO라면 모두 한 권쯤 소장하고 있는 ‘바이블’이다.
스웬슨이 예일대 기금을 맡은 건 1985년. 그의 나이 31세였다.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월가에서 일하던 그에게 CIO 자리를 제안한 건 지도교수였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이었다. 스웬슨은 월가에서 받던 연봉의 80%를 깎인 채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35년간 같은 자리를 지켰다.
1985년 10억달러(약 1조원) 규모였던 예일대 기금은 주식 60% 채권 40%의 ‘지루한’ 포트폴리오로 이뤄져 있었다. 스웬슨은 이를 싹 뜯어고쳤다. 채권은 꼭 필요한 유동성만큼만 보유하고 철저히 주식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짰다. 사실상 영구히 운용되는 대학 기금 특성상 변동성은 크지만 길게 보유하면 수익률이 높은 주식이 더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다변화를 위해 사모펀드, 벤처캐피털, 헤지펀드, 천연자원 등 대체투자 비중을 크게 늘렸다. 지금은 흔하지만 1980년대엔 혁신적인 접근법이었다.
2020년 6월 현재 예일대 기금은 312억달러(약 35조원)에 달한다. 지난 30년간 연 12.4% 수익률을 기록했다. 예일대 총 운영비용의 34%를 기금이 책임진다. 교수 급여와 장학금, 연구비, 박물관 운영비 등으로 쓰고 남는 돈은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 투자한다.
스웬슨이 구축한 투자 전략 및 운영시스템인 ‘예일 모델’은 ‘대학기금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미국 주요 대학 기금이 모두 예일 모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일대 기금이 배출한 스웬슨의 수제자들이 수많은 대학 기금의 CIO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스웬슨 사단이다.
스웬슨은 사모펀드 헤지펀드 등 사모 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일부 고액자산가만 투자하던 이 자산군을 기관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예일대 기금은 트랙레코드가 없는 신생 운용사를 발굴하고 함께 투자 전략을 짜면서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파트너십으로 유명하다.
스웬슨이 67년의 짧은 인생에 이렇게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천재성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투자 철학을 장기간에 걸쳐 실행할 수 있는 권한과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기금 운용을 통해 대학에 기여한다는 한 가지 목표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학들은 여전히 기금 대부분을 예금에 넣어놓고 있다. “주식에 투자했다 돈 잃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는 비전문가들의 목소리에 전문가들은 입을 닫는다. 연기금과 공제회 CIO들은 2년마다 임기가 끝난다. 투자 철학은커녕 업무를 파악할 때 즈음이면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 상전인 이사장들은 대부분 정치인이어서 투자 외에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다. 한국 자산운용업계에서 스웬슨과 같은 탁월한 리더가 나온다면 그건 기적이다. 지구 반대편 투자 천재의 때 이른 죽음만큼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