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RAF와 RAS는 세계 암 연구자들에게 ‘풀지 못한 숙제’이자 ‘필생의 도전과제’로 통한다. 이들 단백질이 과(過)발현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방법만 찾으면 췌장암 폐암 대장암 흑색종 등 수많은 암을 정복할 길이 열리지만, 지난 수십 년간 ‘난다 긴다’ 하는 글로벌 제약회사와 연구기관조차 판판이 깨졌기 때문이다.
‘암 연구자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RAF와 RAS를 일부 암에서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국내 제약사와 연구진이 찾았다. 한미약품이 2016년 미국 바이오기업 제넨텍에 1조원을 받고 기술수출한 신약 후보물질(벨바라페닙)의 효능 연구가 5일(현지시간) 세계 최고 권위 과학학술지인 ‘네이처’ 5월호에 게재된 것이다.
국내 기업이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의 성과가 네이처에 실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벨바라페닙 상용화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6일 기자와 만난 김태원 서울아산병원 암병원장(종양내과 교수·사진)은 네이처에 실린 것의 의미에 대해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흑색종 등 N-RAS 변이 암의 치료 가능성을 보여준 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번 논문의 교신저자(책임저자)로 연구를 총괄했다.
논문의 핵심은 RAS와 RAF 변이가 있는 고형암 환자 135명에게 벨바라페닙을 투여했더니 상당수 환자에게서 암이 줄어드는 부분관해가 나타났다는 대목이다. 전체 환자의 11%, RAS 변이의 일종인 N-RAS 돌연변이가 있는 흑색종 환자의 44%에서 부분관해가 관찰됐다. 생체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RAF와 RAS에 돌연변이가 생겨 과발현되면 암세포가 빨리 자란다. 벨바라페닙은 이들 단백질의 발현을 저해하는 약물이다.
김 원장은 “여러 암을 대상으로 시험한 결과 N-RAS 변이가 있는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효과를 보였다”며 “N-RAS 돌연변이가 흑색종 환자의 23%에서 관찰된 점을 고려해 흑색종을 1차 타깃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벨바라페닙이 다른 RAS, RAF 변이암에도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지는 추가 연구를 통해 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벨바라페닙의 약점으로 꼽히던 내성에 대한 해법도 찾아냈다. 약물 저항성이 생기는 기전을 밝힌 데 이어 현재 처방되고 있는 다른 약제(코비메티닙·MEK 억제제)와 병용하면 해결된다는 걸 전임상을 통해 증명했다.
김 원장은 “벨바라페닙은 기존 항암제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치료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혔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 신약(first-in class)’으로 분류된다”며 “벨바라페닙으로 ‘암과의 전쟁’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제넨텍은 네이처 게재를 계기로 벨바라페닙 임상에 속도를 낼 것으로 알려졌다. 제넨텍은 한국 미국 등 6개국에서 N-RAS 변이 환자를 대상으로 글로벌 임상1상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22개국에서 비전형적인 B-RAF 변이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1상을 할 계획이다.
김 원장은 “기존 약제가 없는 경우 1상에서 효과가 확인되면 곧바로 3상으로 ‘점프’할 수 있는 만큼 벨바라페닙 임상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벨바라페닙의 시판 허가가 나면 한미약품은 계약금 500억원에 이어 추가로 9000억원에 이르는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을 제넨텍으로부터 받게 된다.
오상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