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74세의 'K 할머니'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26일(한국시각)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직후 영화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윤여정과 한예리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여정은 재치 넘치는 수상 소감에 이어 기자간담회에서도 세대를 아우르는 솔직한 입담으로 눈길을 끌었다.
"미국 사람들도 똑같아, 브래드 피트만 물어"
이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전년도 남우조연상 수상자인 브래드 피트가 등장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 제작사 설립자이기도 한 그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브래드 피트와 관련된 질문은 이어졌다.
"미국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더라고요. 그냥 계속 나보고 브래드 피트 봐서 어떠냐고 자꾸 묻더라고. 그 사람은 영화서 자주 봤으니까. 그런데 브래드 피트는 우리 영화의 제작자예요. 사실은. 미국 사람들이 말 근사하게 다 하죠. 다음번에 영화 만들 때 돈 좀 조금 더 써달라고 했다.굉장히 잘 빠져나갔다. '조금' 더 쓰겠다고 했지 크게 쓰겠다고 안 했어요."
"먹고 살려고 연기, 대본이 내 성경"
연기 철학에 대해 윤여정은 "열등의식에서 시작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연극배우 출신도 아니고 연극영화과를 나오지도 않았다. 윤여정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했기에 제 약점을 아니까 열심히 외워서 남에게 피해 안 주는 게 시작이었다"고 털어놨다. 윤여정의 원동력은 절실함이었다. 그는 "내가 연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절실했다. 먹고 살려고 했다. 대본이 제겐 성경이었다. 상 탔다고 너무 멋있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냥 많이 노력했다"
"브로드웨이 명언도 있어요. '어떻게 브로드웨이로 가냐'고 길을 물었더니 '연습'이라고 한다더라고요. 연습은 무시할 수 없어요."
재치 있는 소감에 대해 윤여정은 이렇게 말했다. "입담, 오래 살았잖아요 제가. 좋은 친구들과 수다를 잘 떤다. 수다에서 입담이 나왔나 봐요."
"최고 말고 최중만 되자, 사회주의자 같나?"
아카데미 수상으로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질문에 윤여정은 "그 말이 참 싫다"고 단호히 말했다.
"컴피티션 싫어한다고 1등 그런거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최고 이런거 말고 다 같이 '최중' 하면 안되나요. 최고의 순간인지 모르겠어요.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동양 사람들이 벽이 높아서, 트럼프 월보다 너무 높다고 높은 벽이 됐다고 한다. 제 생각엔 최고가 되려고. 최중만 되며 살면 되잖아. 사회주의자 같나?"
"난 늙은 여우, 감독 만나 싫으면 안 했을것"
'미나리'를 선택한 것에 대해 윤여정은 "60살 넘어서 작품 선택 기준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이 좋으면 한다. 그렇게 사치스럽게 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미나리'에 대해 윤여정은 "진지하고 순수하고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했다.
"기교가 있게 쓴 작품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야기를 썼고 그게 늙은 나를 건드렸어요. 그래도 제가 잘 안넘어와요. 독립영화니까 이코노미 타고 오라고 했어요. 제가 70이 넘어서 난 못타요. 젊을 땐 탔겠지만. 독립영화라고 하니까 제 돈으로 왔어요.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대본을 전해주는 아이를 믿었어요. 안목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심을 믿은 거죠. 그런데도 내가 늙은 여우니까 감독을 만나 싫으면 안 했을거예요. 정이삭 감독을 봤는데 요새 이런 애가 있나? 싶었어요. '진정성'이란 단어 쓰기 싫은데, 진정성,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거 만들 땐 (아카데미에 올지) 상상도 못했어요."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느냐"
'미나리'의 순자 역을 통해 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윤여정은 "제가 잘한건 아니고 스크립트를 대본을 잘 쓴 것"이라고 겸손히 답했다. "할머니, 부모가 희생하고 그러는 건 국제적으로 유니버설한 이야기 잖아요. 감독은 진심으로 썼어요. 내가 평론가도 아니니 그런 건 평론가에게 물어보세요. 배우는 자기 역할을 열심히 연구해요.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런 건 몰라요. 앞으로 계획이야? 없어요. 그냥 살던 대로 살거예요. 오스카 상을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예전부터 결심한 게 있는데요, 남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 하며 흉 안 본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
윤여정은 수상 소감에 김기영 감독과 정이삭 감독을 언급한 이유를 말하기도 했다.
"영화는 관록이에요. 그걸 한 60살 넘어서 알았어요. 그래서 감독이라 하는건데, 바닥부터 다 아울러야 하더라고요. 영화는 종합예술이라 그걸 할 수 있는건 대단한 능력이에요. 봉준호든 누구든 다 대단해요. 김기영 감독을 만난 건 스물 몇 살 때 사고에 의해 만났어요. 정말 죄송한 건 그 분에게 감사하기 시작한건 60살이 되어서예요.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 전까지 너무 이상한 사람이라고 나는 너무 힘든 감독이고 싫었어요. 사람들은 다 천재라고 하는데. 그래서 늘 죄송하고 지금까지 후회해요."
"김기영 감독은 어렸을 때, 정이삭 감독은 늙어서 만났어요. 우리 아들보다 어린 애인데 현장에서 수십명을 컨트롤하려면 돌거든요. 그런데 차분하게 하더라고요. 누구도 모욕 주지 않고 업신 여기지 않고 존중해요. 내 친구들이 많잖아요. 제가 일해서 흉 안보는 감독은 정이삭이 처음이래요. 코리안 아메리칸이잖아요. 한국 종자로 미국 교육을 받아 세련된 한국인이 나온 거라고 생각해서 희망적이었어요. 걔라고 화 안 나겠어요? 그런데도 컨트롤 하더라고요. 마흔 세 살 먹은 애한테 존경한다고 했어요. 김기영 감독에게 못한 걸 정이삭 감독이 다 받는 것 같아요. 제가 감사를 아는 나이가 됐잖아요.
"김연아, 얼마나 힘들었을까…운동선수 된 기분"
윤여정은 국민들의 성원에 대해 "축구 선수들의 심정을 알겠더라"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아무 계획 없고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응원을 하니 눈 실핏줄이 다 터졌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은 성원인데 나는 이걸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가 된 거잖아요. 나는 받을 생각도 없었고 노미네이트 된 것만 해도 나는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 이러니까 너무 힘들어서 나는 그 운동선수들의 심정을 알겠더라고. 2002년 월드컵 할 때 그 사람들 발 하나로 온 국민들이 난리를 칠 때 걔네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너무 안됐더라고. 그리고 김연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 제가 운동선수가 된 기분이었어요. 세상에 나서 처음 받는 스트레스였어요. 그건 별로 즐겁지 않았습니다. 진짜 우리는 그냥 즐거우려고 그랬어요. 세상에 우리가 오스카까지 가는구나. 그럼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고 하고 우리는 오늘도 구경했어요, 예리랑 나랑. '어머, (아카데미는) 이렇게 하는구나' 그랬어요."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