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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현장밖에 모르던 '미술 문외한'…예술가 든든한 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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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15~17세기 금융업으로 번 막대한 돈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르네상스 예술의 꽃을 피워냈던 명문가다. 광주를 기반으로 하는 중견건설사인 영무토건의 박헌택 대표(58·사진) 역시 12년째 광주에서 활동 중인 젊은 미술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이들에게 금전을 지원하거나 무료로 전시회를 열어주고, 전시가 끝나면 이들의 작품을 매입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지역에서 ‘광주의 메디치’로 불린다.

지난 15일 광주시 동구 대인동 대인시장 인근에 있는 복합예술공간 ‘김냇과’에서 만난 그는 이런 세간의 평가에 손사래를 쳤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책임감을 느껴요. 그런데 분명한 건 이런 후원 없이는 지역 기반 작가들은 존립할 수 없다는 거예요. 특히 서울에 비해 전시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지역 작가들에게 돈만큼이나 절실한 게 자신을 알릴 공간이죠.”

‘김냇과’는 그가 2017년 직접 설계해 만든 복합예술공간이다. 지하와 2층은 미술 갤러리와 소규모 음악공연 공간으로, 1층은 북카페로, 3층은 여행객을 위한 레지던스로 꾸몄다. 지역 화가들은 이곳에서 두 달씩 전시회를 연다. 코로나19 이전엔 인근 주민들을 불러 작은 음악회도 열었다. 원래 이 건물은 1973년 지어져 25년 동안 병원으로 쓰였다. 1998년 문을 닫은 뒤엔 20년 가까이 다방과 식당, 실내 주점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이름만 듣고 “그때 그 김내과가 다시 문을 연 줄 알고 찾아왔다”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당시 이 건물 근처에 전남 전역을 다니는 버스터미널이 있어 사람들로 항상 붐볐습니다. 광주 사람들 중에 김내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한때 의술을 통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했던 병원 건물에서 이젠 예술로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감동을 전달하겠다는 의미를 잇고 싶었어요. 그래서 옛 이름에 사이시옷 하나만 더 넣은 거죠.”

박 대표는 평생 그림을 그려본 적도, 미술을 공부한 적도 없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예술의 가치를 알고 미술가를 후원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2000년 삼성물산이 처음 선보인 아파트 브랜드 ‘래미안’을 처음 보고서였다.

“당시 지역 건설인들에겐 어떤 절실함이 없었어요. 좋은 땅에 아파트 단지를 짓고 나면 끝일 뿐 그 이상 지속하려는 생각은 안 했죠. 한자로 지은 래미안(來美安)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충격을 받았어요. 글씨체와 어감, 담긴 의미 모두 예술적이었어요. 사람들은 이제 래미안을 삼성이 지은 아파트가 아니라 문화적인 브랜드로 기억합니다. 지역 중견 건설사가 성장하려면 이런 예술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제 건설업에도 문화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술 후원을 시작했죠.”

박 대표 역시 ‘예다음’이란 아파트 브랜드를 내놨다. 회사 이념도 ‘Life is Art(삶은 예술이다)’로 바꿨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 후원을 시작했다. 광주 지역 화가인 강운 작가에게 매달 1000만원씩 2년간 2억4000만원을 지원했고 광주 청년 화가들에게도 꾸준히 금전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후원을 하면 할수록 작가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공간’과 ‘기회’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회사 1층 로비에 미술 갤러리를 만들고 분양이 끝난 자사 아파트 홍보관을 개조해 작가들의 전시장으로 내줬다. 광주 ‘수완 영무예다음 1차’ 아파트를 시작으로 전국에 있는 영무예다음 아파트 단지 1층 커뮤니티에 청년 작가들이 작업하고 생활하는 레지던스를 마련해줬다. 광주 대인시장에서 활동하는 젊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을 찾아가 아파트 건설현장 안전망과 외벽에 그라피티 작품을 그릴 수 있게 해줬다.

박 대표는 예술 후원을 통해 얻은 영감을 여러 사업에 접목하고 있다. 복합문화공간인 김냇과와 최근 지역 작가들의 전용 작업공간으로 조성한 ‘김냇과2’가 박 대표의 지역 미술 인큐베이터라면 지난해 개관한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앞에 세운 ‘영무파라드호텔’은 상업시설과 연결된 지역 미술의 거대한 무대다. 호텔은 박 대표가 설계해 직접 운영하고 있다. 해운대에 밀집한 수십 개 호텔 사이에서 벌써 ‘아트 호텔’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외관부터 내부까지 하나의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 호텔 내벽은 국내외 대표 그라피티 작가들이 그린 대형 그라피티 작품으로 채워졌다. 로비와 객실 복도엔 광주·대구 지역 출신 작가들의 조각 작품을 배치했다. 대구 계명대 학생 33명이 각자 그린 작품을 객실에 걸고 ‘아트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를 만나러 가며 ‘건설사 대표가 왜 사업과 큰 연관이 없는 미술에 빠져 있을까’ 궁금했다. “건축이 바로 예술 아닙니까? 하드웨어는 콘크리트지만 건물 안은 온갖 소프트웨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소프트웨어를 상상해내고 연출하는 게 바로 예술가들이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미술품을 사요. 전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이어가고 싶어서 그들의 작품을 삽니다. 그림의 가치보다는 그들에게 삶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은 거죠. 나 같은 후원자가 있으면 열심히 안 그리겠어요?”

광주=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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