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1일 “노동 유연성 문제를 해결해 고용 절벽을 깨고, 규제 개혁으로 대기업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두고는 “승자독식 구조를 강화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강조하는 현 정부 기조와 차별화되는 주장이다. 정치권에 대해서는 “흑백논리, 진영논리로 싸우고 있다”고 지적하며 ‘제3지대’ 정치 가능성을 시사했다.
정치 과잉이 성장 가로막아
김 전 부총리는 이날 사단법인 도산아카데미(이사장 구자관) 주최로 열린 ‘도산 리더십 포럼’에 참석해 ‘대한민국의 유쾌한 반란’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유쾌한반란은 김 전 부총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단체 이름이다. 그는 부총리 퇴임 후 이곳에서 청년 멘토링 활동을 해 왔다.그는 이 자리에서 “‘정치·국가 과잉 세태’가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가)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국가 과잉 때문”이라며 “과거의 관(官) 개입주의가 경제와 시장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성장을 해도 고용의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고, 여러 규제로 사업할 기회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등 노동시장 규제 정책을 잇따라 내놓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김 전 부총리는 청와대가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 감소와 상관없다”고 강변하자 2018년 5월 국회에 나와 “경험이나 직관으로 봐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과 임금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반박한 바 있다.
김 전 부총리는 현 정부 공약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직접 언급하며 정부 개입의 한계를 꼬집었다. 그는 “정권마다 현란한 구호를 앞세워 고른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인지 의문”이라며 “비정규직 일부를 정규직화하면 승자독식 구조는 유지된다”고 말했다.
그는 규제 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전 부총리는 “노동 유연성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일자리 절벽을 깰 수 있다”며 “규제 개혁으로 대기업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은 무조건 지원해야 한다는 환상을 깨고, 중소기업 지원은 기업가 정신이 나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기성 정치 불신 내비쳐
김 전 총리의 이번 강연은 향후 정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정·관계의 시각이다. 김 전 부총리는 차기 대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영입에 관심을 두는 인사다. 그렇지만 부총리 퇴임 이후 줄곧 정치와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였다. 지난 4·7 보궐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출마 권유를 거절한 그는 이날 강연에서 “청와대의 총리직 제안도 고사했다”고 밝혔다.대신 김 전 부총리는 최근 각종 강연 등을 통해 대국민 소통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달 12일 부산 동아대에 이어 지난 12일 서울 하나금융지주 사옥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했다. 오는 28일에는 고향인 충북 음성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다.
이날 강연에서는 기성 정치권을 비판하며 제3지대 정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는 “정치가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모든 이슈가 정치화하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며 “권력이 견제받지 않으면, 창의와 자유는 억제된다. 정치는 줄이고, 권력은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혁신과 개혁의 가늠자는 자기 진영의 금기를 자기가 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며 “진보는 진보의 금기를 깨야 하고, 보수는 보수의 금기를 깨야 한다”고도 했다. 기득권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를 포섭하려는 말로 해석된다. 하지만 김 전 부총리는 “오늘 강연이 정치 참여 의미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총리직 제안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통령 인사권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지극히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