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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칼럼] 다자무역체제라는 철 지난 유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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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유행가가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다자무역체제 복귀’다. 지난주 한국경제신문사 주최 세계 경제·금융 콘퍼런스에서 초청 연사인 제프리 삭스, 앤 크루거는 하나 같이 다자체제를 무시했던 도널드 트럼프 4년간 미국의 일탈을 비난하면서 조 바이든 신행정부에 다자무역체제 복귀를 종용했다.

그들의 주장은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일편단심 짝사랑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것이다. 다자무역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트럼프의 일방주의 때문이 아니다. 트럼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 전 이미 다자무역체제는 삐걱거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의 유명무실화 때문이다. 세상이 디지털 경제로 급속히 바뀌었는데, WTO 규범은 디지털 이전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자동차, 철강, 전자, 석유화학 등 전통적 산업에서 WTO 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은 트럼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에는 중국이 있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할 때, 세계는 중국이 후퇴하지 않는 개혁과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고 믿었다. 심지어 미국과 서구세계는 WTO 다자무역체제가 중국의 정치체제를 연성화시킬 것으로 믿었다. 세상의 기대와 달리 중국은 국가 주도의 비시장경제적 통제와 진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조치, 기술이전 강제, 비공식 규제가 전자라면, 중국 기업에 대한 광범위하고 편파적인 보조금이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경제국가 간 무역을 전제로 한 WTO 규범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한 비시장경제국가 중국을 다루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WTO 규범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WTO는 철저하게 정치적 대립의 장으로 변질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힘을 합쳐도 중국, 인도, 브라질 등 개발도상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2015년 12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WTO 통상장관회의에서 미국과 EU가 WTO 규범혁신을 더 이상 WTO에만 맡길 수 없다고 한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이 21세기 통상규범을 쓰게 할 수는 없다”며 아태지역 국가들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한 이유도 WTO에서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중국의 시진핑과 관세 전쟁을 벌이면서 중국을 코너로 몰아넣은 다음, 중국의 일방적인 양보를 문서화한 1단계 합의를 기억하는가. 작년 1월 15일 백악관에서 서명식을 하기 바로 전날 미국이 EU, 일본과 중국의 보조금을 견제하는 합의문을 도출했다는 것은 미국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쉽사리 짐작하게 만든다.

바이든에게 다자무역체제로 복귀하라는 주문이 왜 공염불인지 보여주는 두 가지 결정적 대목이 있다. 그 하나는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가 쌓아 올린 대(對)중국 고관세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월 말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의료기기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공급망을 개편하라는 행정명령이다. 미국은 자신이 설계하고 확대해 온 WTO 다자체제로 복귀할 생각이 없다. WTO로는 중국의 거친 비시장경제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알리바바를 세계 최고 디지털 유통기업으로 성장시킨 마윈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중국의 국가 주도 비시장경제의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핵심 소재의 글로벌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는데, 다자체제로 복귀하라는 주문은 공염불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문제 인식이다. 한국의 공식 입장은 다자무역체제의 우월성, 바람직함을 견지하는 것이다. 동맹에도 할 말은 한다는 것은 주권국으로서 당연한 자세다. 그 연장선상에서 최대 무역 상대국에도 당당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국가엔 침묵과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동맹국엔 어느 한쪽에 서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면 세계의 눈에 한국은 어떻게 비칠까. 그들의 시선이 세계 여론을 만들어 내고 한국이 설 입지를 결정짓게 될 텐데. 그렇게 조성된 정치 지형은 과연 한국 국민이 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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