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9.’ 고위공직자 1885명의 올해 ‘정기 재산변동사항’이 담긴 관보 8권의 총 쪽수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는 이처럼 수천 쪽에 달하는 고위공직자의 재산변동 사항을 매년 3월 말 관보를 통해 ‘일방적’으로 공개한다. 굳이 일방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관보를 잠깐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조악한 표에 재산 내역이 나열된 관보에서는 독자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3기 신도시에 땅을 가진 공직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PDF 파일 관보에서 일일이 지역 명칭을 검색해봐야 한다. 비상장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공직자는 누구인지, 누가 가장 많은 재산을 일궜는지 찾는 것은 더 어렵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말 그대로 ‘공개’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얘기다.
재산공개를 담당하는 인사혁신처는 “법에 나와 있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공직자윤리법 10조1항에 ‘재산변동사항은 관보를 통해 공개하라’고 명시된 것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이다. 인사처 관계자는 “관보는 위·변조를 방지하기 위해 PDF 파일로 제공할 수밖에 없다”며 “공직자 재산 내역을 가공해 알기 쉽게 제공하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해명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공무원 특유의 ‘면피 행정’에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다. 인사처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철학인 ‘적극행정’을 공직사회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은 부처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사처는 ‘적극행정이란 업무 관행을 반복하지 않고, 불합리한 규정과 절차 등을 스스로 개선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직사회의 모범이 돼야 할 인사처의 ‘수동 행정’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공직사회가 답답하게 움직이니, 국민이 능동적·적극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반도체 클러스터 개발 예정지 투기 의혹이 불거진 경기 용인 원삼면의 일부 주민들이 통합대책위원회를 꾸려 자체 조사에 나선 게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새벽까지 토지 등기부등본을 떼고, 투기 의심 사례도 직접 찾았다.
부동산 민심이 들끓자 여당은 재산신고 대상을 공공기관 임직원 등 모든 공직자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재산공개 대상자를 ‘1급 이상’에서 ‘3급 이상’ 공직자로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하지만 재산공개 제도가 지금처럼 행정편의적으로 운영된다면 결국 관보 쪽수만 늘어날 뿐이다. 늘어난 대상자 사이에서 투기 의심자를 솎아내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지난 26일 임명된 김우호 신임 인사혁신처장은 취임사를 통해 “적극행정의 정착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스스로 면피행정에 함몰된 것 아닌지부터 돌아볼 일이다. 정부를 믿지 못해 감시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는 국민 앞에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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