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매도 뒤엔 한국계 투자자 빌 황
미국 뉴욕증시에서는 지난 26일 대형 미디어와 중국 기술주 위주로 190억달러(약 21조5000억원) 규모의 블록딜이 쏟아져 나오면서 관련 기업의 시가총액이 350억달러가량 증발했다. 블록딜은 대량 주식을 시간외 등에서 매수자와 매도자가 서로 협정한 금액에 사고파는 거래를 뜻한다. 골드만삭스 창구에서 개장 전과 장 중을 포함해 총 세 차례에 걸쳐 106억달러의 블록딜이 발생했고, 모건스탠리 창구를 통해서도 장 중 40억달러씩 두 차례에 걸쳐 매매됐다.미 증시는 이 대규모 매도세 영향으로 정규 시장까지 흔들렸다. 비아콤CBS와 디스커버리가 27% 폭락 마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하루 최대 낙폭이었다. 주간 하락폭은 50%에 육박한다. 중국 기업인 바이두와 텐센트 등도 지난주 20~30% 급락했다.
외신들은 이번 사태의 배후에 빌 황이 이끄는 아케고스캐피털이 있다고 지목했다. 아케고스는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IB로부터 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 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중국 기술주 등이 급락하자 IB들은 마진콜을 요구했다. 주가 하락으로 원금 손실의 위험이 발생하자 아케고스에 증거금을 추가로 내라고 요구한 것. 하지만 아케고스는 이를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IB들은 블록딜을 통해 아케고스가 보유한 주식을 강제로 처분했다. 주식은 싼 값에 팔렸다. 주식 매각 대금은 아케고스에 빌려준 금액에 못 미쳐 IB들은 대규모 손실을 떠앉게 됐다.
블랙리스트 인물에게 차입거래 지원
문제는 빌 황이 이미 월가에선 2012년 내부자거래 문제로 블랙리스트에 지정됐던 인물임에도 주요 IB들이 그에게 수십억달러의 자금을 제공하며 차입거래를 할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이다. 빌 황은 1990년대 초 현대증권에서 일했고, 이후 미국 헤지펀드인 타이거매니지먼트에서 큰 수익을 낸 펀드매니저로 알려졌다. 빌 황은 미국 헤지펀드 거물인 줄리언 로버트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타이거 아시아를 설립해 50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운용하며 잘나갔다. 그러나 타이거 아시아가 2012년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중국 은행주를 거래한 것이 적발돼 차익을 몰수당했고 골드만삭스 등에선 그와 거래를 중단했다.빌 황은 이후 아케고스캐피털매니지먼트로 이름을 바꿔 가족 자산 등을 투자하는 ‘패밀리 오피스’ 형태로 운용을 이어 나갔다. 주요 은행들이 막대한 수수료를 안겨주는 그와 거래를 재개하면서 블랙리스트 명단에서도 지워졌다.
그는 투자 원금보다 몇 배 많은 레버리지를 일으켜 롱쇼트 전략으로 펀드를 운용했다. 현재까지 아케고스 관련 매도 물량은 200억달러가 넘고, 300억달러에 달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출 제공한 IB들 비상
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준 은행은 비상이 걸렸다. 스위스 은행인 CS는 29일 “익명의 미국 헤지펀드 고객이 마진콜을 불이행한 점과 관련해 1분기 상당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성명을 냈다. 일본 최대 금융회사인 노무라도 “미국 고객사와 거래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자회사 중 한 곳이 20억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날 도쿄증시에서 노무라 주가는 16% 급락했다. 외신에 따르면 아케고스와 거래한 주요 은행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CS, UBS, 노무라 등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이번 블록딜 이전에 아케고스에 대한 대출을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이번 사태로 지난주 주가가 폭락한 중국 텐센트뮤직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하기도 했다. 텐센트뮤직은 미국 예탁증서(ADS)를 대상으로 최대 10억달러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텐센트 등 중국 기술주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감사기준 강화에 블록딜까지 겹치며 추가 매도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