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집값을 잡겠다며 일관되게 '규제'로 대책을 내놓다가 뒤늦게 '공급'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문가를 비롯해 무주택 수요자들에게 안심을 심어줬던 터였다. 하지만 LH사태로 공급대책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정부는 '흔들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연일 밝히고 있지만, 이러한 말만으로는 낙담한 주택 수요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내 집 마련하려고…고민보다 GO하는 무주택자들
아파트는 수억원에 달한다. 시장경제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재화이기도 하다. 집값이 오르면서 스포츠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새 아파트값은 비싸졌다. 내 집 마련은 한 사람 내지 한 가족의 터전과 인생을 결정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수십번 수백번을 고민하고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민할 새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청약'하는 시대가 됐다. 기존 집들을 사는 건 물론이고 그나마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집을 구할 수 있는 청약에는 수만명 내지 수십만명까지 몰리고 있다. 이 청약판에 수요자들은 대부분 '올인'을 외친다. 자신의 모든 것(심지어 영혼까지 끌어모아)을 걸고 집에 승부를 띄우고 있다.2019년 3기 신도시가 발표되고 남양주, 하남 등으로 이주한 무주택자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기가 막히다. 3기 신도시를 보고 '올인'한 이들이다. 이들은 LH사태를 보면서 양가적(兩價的)인 마음이 든다. 사건만 놓고 보면 '3기 신도시 취소'가 마땅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래도 추진'해야 해서다. 2019년 하반기~2020년까지 거주요건을 감안해 남양주나 하남으로 이주한 수요가 많았다. 정확한 추정은 어렵지만, 이 때문에 지역 전셋값 상승률이 전국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였다. 정부의 '3기 신도시' 대책을 믿고 싼값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기꺼이 세입자가 된 이들이다.
하남시 신장동에 살고 있는 김모씨도 이러한 경우다. 그는 "정부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 또한 3기 신도시를 바라보고 2019년에 하남으로 이주했다. 오래된 아파트이긴 했지만 전셋값이 2억원대였고, 자녀들도 어려서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맘 편한 세입자 생활은 1년도 가지 않았다. 지난해 임대차법 시행 이후 전셋값이 5억원대까지 폭등했다. 최근에는 그나마 진정상태라고는 하지만, 크게 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 씨는 "올해 일단 전셋값을 올려서 갱신을 하겠지만, 2년 후에는 어찌해야할지 난감하다"며 "3기 신도시가 빨리 나와야 할텐데 최근에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제대로 될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싸고 확실했던 공공분양…신뢰 무너진 주택공급
'공공'과 '민간'은 주택공급의 양축을 담당하고 있다. 공공은 싸고 일정을 기약할 수 있고, 민간은 이와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재건축·재개발과 같은 도시정비사업의 경우 일반분양이 언제 나올런지를 알기는 어렵다. 공공을 기다리는 무주택 수요자들은 민간 보다는 일정이 확실한 공공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제는 이러한 공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상태가 됐다.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3기 신도시를 철회해 달라'는 청원에 동의자가 10만명을 넘었다. 부동산과 관련돼 청원이 10만명이 넘은 건 이례적이다. 검찰의 수사를 촉구한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의 청원 또한 4만500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그만큼 LH사태에 공분하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김 씨같이 3기 신도시를 바라보고 터전을 옮긴 무주택자들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 그는 "청원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3기 신도시를 기다리고 있는 무주택자들은 없을 것"이라며 "3기 신도시가 취소되거나 축소·연기라도 된다면 지난간 2년의 시간과 인생을 어디에서 보상받으라는 말이냐"라고 호소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2·4대책을 비롯해 주택공급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3기 신도시를 비롯해 공공택지 토지주들과 주민들이 집단으로 반발하고 있다. 땅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을 제대로 공급하겠다'는 정부의 선언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고 있다.
주택공급 차질없다면서…자리에 미련없는 장관
LH를 국내 최고의 디벨로퍼(개발사업자)라고 확언했던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2일 LH사태와 관련 "책임지고 수습하겠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는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 19일 언제까지 재직하냐는 질문에 "(교체) 날짜가 확정되진 않았다"면서 "입법의 기초를 마련할 때까지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연연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무주택자들은 분통이 터진다.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집 하나 마련하겠다고 인생을 내 던지는 와중에 책임자는 집착도 미련도 없다고 공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꽃자리'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작년 7월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처음으로 대국민 사과를 했던 때와도 비슷한 상태다. 당시 김 전 장관은 "집값이 올라 죄송하다"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시골의 빈집, 30년이 넘은 빌라와 새 아파트까지 다 더해서 백분율로 산정한 값인 '주택보급률'로 공급이 충분하다고 줄곧 주장했다. 다주택자, 법인 탓을 하면서 집이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뒤늦게 내놓은 공급대책까지 난관에 봉착했다. 집값을 잡을 수 있는 '규제'와 '공급'. 그 무엇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만큼은 자신있다"고 했던 말을 곱씹어 본다. 대체 뭐가 자신있다는 것이었을까.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