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한 윌리엄 스피크먼 병장이 타계하기 전 남긴 유언입니다. 스피크먼 병장은 영국 육군 왕실 스코틀랜드 국경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951년 11월4일 경기 연천군 마량산 방어 임무에 투입돼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에 수류탄을 던지며 백병전을 감행했습니다. 다리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은 스피크먼 병장이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며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한 덕분에 해당 중대는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52년 1월 부상으로 영국으로 후송됐지만 3개월 뒤 자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도 않은 몸으로 그해 8월까지 전장을 누볐습니다. 몸바쳐 한국을 지킨 영국의 ‘전쟁 영웅’은 유언에 따라 2019년 2월 결국 한국 땅에 묻히게 됩니다. 바로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입니다.
11개국으로 이뤄진 독립기구가 관리
유엔기념공원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1년 1월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조성이 시작됐습니다. 한국 국회는 1955년 토지를 영구히 기증하기로 유엔에 건의했고 유엔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공원 관리도 한국 정부가 아닌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UNMCK)가 담당합니다. 한국 정부는 이곳에 분담금을 내는 회원국 중 하나일 뿐입니다. 유엔기념공원에 들어서면 단번에 일반적인 한국의 묘지나 공원과는 조경 양식부터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유엔군 2300위가 모셔져 있는 묘역은 일반적인 봉분이 아닌 작은 비석과 함께 네모난 모양의 관목이 조성돼있습니다. 돌아가신 영웅들의 국적을 구분하기 위해 묘역에는 각국 국기가 꽂혀있습니다.
묘역에 안장된 영웅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스피크먼 병장 등 영국 국적 참전용사가 886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영국을 제외한 영연방 국가 국적이 704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전사자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전통이 있는 미국과 달리 영연방 국가들은 군인이 전사한 그 땅에 시신을 매장하는 문화가 있어서입니다.
공원에는 ‘도은트 수로’라는 좁은 시냇물이 흐릅니다. 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인 호주군 J.P. 도은트 상병의 이름을 딴 물길입니다. 도운트 상병은 1951년 낯선 땅에서 17세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주묘역에서 도운트 수로를 지나면 각국의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있는 상징구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매년 11월11일 전세계는 부산을 향해 묵념
지난해 11월11일 오전 11시, 이 공원 위로 공군 블랙이글스가 추모 비행을 했습니다. 부산시 전역에는 1분간 사이렌이 울려 퍼졌습니다. 사이렌이 울리고 6·25전쟁에서 희생된 유엔군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한 1분간 묵념이 진행됐습니다.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추모 행사입니다.이 행사는 2007년 6·25전쟁 참전용사인 캐나다인 빈센트 커트니씨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22개 유엔참전국과 유엔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자는 차원입니다. 행사는 헌화 및 1분간 묵념, 참전국기 입장 등 추모식, 기념공연, 전사자 묘역참배 순으로 열립니다.
한반도 전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6·25전쟁의 추모 행사가 콕 찝어 부산에서 이뤄지는 이유도 바로 이곳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유엔기념공원은 전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입니다. 유엔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6개국의 유엔군을 구성해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때문에 6·25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국 외교사절들은 방한할 때 이곳을 꼭 들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소중한 곳에 대해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며 의아해합니다.
부산에서 한 참전용사의 유족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미디어에서도 6·25전쟁의 실상과 이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다루는 것이 금기시돼버린 것 같다”며 “젊은 세대가 보훈에 대해 잘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6·25전쟁의 참상, 대한민국을 위해 전사한 4만여명의 유엔군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일평생 어려운 삶을 살다 돌아가신 참전용사 분의 유족 말씀이 유독 여운이 남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부산=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