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AI)에서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습이 돼 있지 않다. 우리만의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지형 성균관대 AI학과장)
국내 AI 분야 최고 권위자들은 한국이 AI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선택과 집중’을 꼽았다. 미국과 중국 등 주요 2개국(G2) 주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AI 원천기술을 따라가기보다 이를 활용한 응용 분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학과장은 “미국과 중국은 인구와 시장 크기를 놓고 봤을 때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며 “구글에서 영어로 자연어 처리 엔진을 만드는 것과 세계에서 1억 명도 안 쓰는 한국어로 자연어 처리 엔진을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인터넷 등의 인프라와 탄탄한 제조업 기반 산업 구조를 감안할 때 스마트팩토리와 같은 분야를 골라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AI 경쟁우위는 ‘제조·의료’ 산업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도 한국만의 ‘차별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놨다. 차 원장은 “미국이 했다고 해서 한국이 따라갈 것이 아니다”며 “제조업 AI 분야는 미국도 못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나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조성배 연세대 AI대학원장은 “어느 국가를 돌아보더라도 한국만큼 제조업과 서비스업, 인터넷 인프라 등 전 산업 분야가 고루 발전한 곳을 찾기 힘들다”며 “우리가 보유한 소프트웨어 역량을 이용해 실제적 문제를 남들보다 빨리 풀어낼 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 비교우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환 고려대 AI연구소장은 “AI 기술 발전을 위해선 대학과 기업의 협력이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며 “최근 삼성전자, LG전자 등 기업들이 교수를 영입한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임종우 한양대 AI학과장은 “대학에서 AI 기술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분야로 퍼뜨리는 역할도 필요하다”며 “산학협력을 통해 실제 현장에 AI를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종원 GIST(광주과학기술원) AI대학원장은 “대학이 AI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잉크 마르기 전 새 사업 찾는 정부”
정부의 AI 육성 정책에 대해선 쓴소리가 쏟아졌다. 질적 성장보다는 ‘숫자’에 연연하고, 틀을 닦아야 할 기존 사업보다 새로운 사업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영주 포스텍 AI 연구원장은 “정부 입장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싶어 하는 취지는 이해한다”면서도 “정부의 목표가 ‘AI 인력 몇천 명 양성’과 같은 양적인 부분에 치중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정송 KAIST AI대학원장은 “정부가 돈을 많이 넣고는 있지만 기존에 만들어 놓은 사업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신규 사업을 내놓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이전 사업은 잊어버리기 일쑤”라고 비판했다. ‘확실한 사업을 골라 현실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삼혁 UNIST(울산과학기술원) AI대학원장은 “정부가 대학원 하나에 20억원을 지원한다고 하면 많아 보이지만, 교수 20명을 뽑고 학생 50명 뽑아서 1년 교육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며 “사업을 깊고 좁게 파야지 얇게 펴면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덧붙였다.
윤리이슈, 규제보다 교육에서 해법
AI 윤리 역시 화두에 올랐다. 최근 AI 챗봇 ‘이루다’가 촉발한 논란에 대해 이들은 “문제점에 공감하지만 섣부른 제한은 자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 원장은 “AI 윤리 문제는 규제보다 교육으로 풀어야 한다”며 “위험한 것은 AI가 아니라 사람 자체”라고 꼬집었다.부정적 요인만을 생각한다면 아직 초기 단계인 AI산업 발전이 더딜 수 있다는 우려도 강했다. 조 원장은 “AI가 인간을 모방한 기술인 만큼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걱정이 많은 것 같다”며 “조급하다고 생각하고 정부가 주도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든다”고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가 ‘AI 100(원헌드레드)’이라는 슬로건 아래 100년 동안 경제, 사회, 법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겠다는 초장기 플랜을 내놓은 것처럼,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접근보다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다. 차 원장은 AI의 윤리 기준 확립에 대해 “법률가와 철학자에게만 (윤리와 법률 이슈를) 맡길 게 아니라 AI연구자들을 아우르는 접근이 돼야 현실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진원/이시은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