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추진한 유상증자 안건이 6일 주주총회를 통과해 국적 항공사 통합이 한고비를 넘겼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전날 전격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지분 절반을 차지하는 소액주주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일각에선 작년 말 LG화학 분할에 반대했던 국민연금이 이번에도 시장 예상과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기투자자인 국민연금이 기업의 미래 성장성보다 눈앞의 위험 회피에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대한항공 유상증자 안건 ‘통과’
대한항공은 이날 임시주총을 열고 발행주식 총수를 2억5000만 주에서 7억 주로 변경하는 정관 변경안을 통과시켰다. 의결권 있는 주식 1억7532만466주 중 55.73%인 9772만2790주가 출석했고, 찬성률은 69.98%였다. 정관 변경은 특별결의 사항이어서 출석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과 발행 주식 수 3분의 1 이상 찬성이 가결 조건이다.
전날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는 대한항공의 정관 변경안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대규모 유상증자로 대한항공의 주주 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주요 주주인 우리사주조합과 크레디트스위스(CS) 및 소액주주가 대거 찬성표를 던져 ‘커트라인’을 넘었다.
이날 변경안 가결로 아시아나항공 인수 절차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오는 3월 2조5000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할 예정이다. 국민연금이 설사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주주들이 추가 청약으로 실권주를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투자업계는 보고 있다.
앞서 3000억원을 인수계약금으로 지급한 대한항공은 유상증자 대금 중 4000억원을 아시아나항공에 중도금으로 납부한다. 이어 6월 30일 아시아나항공의 1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때 계약금과 중도금을 뺀 8000억원을 납입해 아시아나항공 지분 63.9%를 가진 최대주주가 된다.
미래 성장성 외면하는 국민연금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이날 정관 변경안이 가결되자 투자업계선 “예상했던 결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하늘길이 막혀 항공산업이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통합 결정은 대한항공에 중장기적으로 호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추진을 공식화한 지난해 11월 12일 이후 대한항공 주가는 약 15% 상승했다.일각에선 국민연금의 굵직한 주주 활동을 결정하는 수탁위의 행보가 장기투자자인 국민연금의 투자 방향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은 수탁위의 대한항공 안건 반대 결정이 작년 10월 LG화학의 배터리사업 물적분할 안건에 반대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당시 수탁위는 성장성이 높은 배터리 사업 확대라는 분할 취지는 이해하지만 지분 가치 희석으로 주주 가치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분할 안건은 주총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가결됐다. LG화학 주가는 국민연금의 반대 결정 이후 60만원 중반대에서 꾸준히 올라 6일 89만원까지 급등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재 수탁위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수탁위는 경영계, 노동계, 지역가입자 단체가 3명씩 추천한 총 9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된다. 각 위원은 기업지배구조나 금융 부문에서 경력을 갖춘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상당수 안건에서 수탁위 표결은 경영계와 노동계로 편이 갈린다. 캐스팅보트는 지역 가입자 추천 인사 3명이 쥐고 있다. 사실상 노동계의 입장과 일치하는 참여연대가 추천한 위원이 지역 가입자 측에 포함돼 있어 애초부터 무게추는 4 대 3으로 노동계 쪽에 기울어져 있다.
수탁위가 찬성과 반대가 몇 명으로 갈렸는지, 결정의 근거는 정확히 무엇인지 외부에 설명하지 않는 것도 불신을 키우는 요인이다. 과거 수탁위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민간 전문가들이 주주 활동을 전문적, 객관적으로 수행하자는 것이 수탁위의 취지”라며 “당초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매번 편 가르기식 결정만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환/강경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