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와 고용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기간산업이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1차 대유행이 한창이던 지난 4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40조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 조성을 통해 기간산업을 지켜내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 지시에 따라 기안기금 설치는 급물살을 탔다. 관련법 개정안이 이튿날 발의됐고, 같은 달 29일 국회를 통과했다. 한 달 후인 5월 28일 산업은행 주도의 기안기금이 출범했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현재 기안기금 상황은 어떨까. 우선 기안기금을 활용한 기업은 아시아나항공과 제주항공 두 곳뿐이다. HDC현대산업개발과의 매각 협상이 ‘노딜’로 끝나면서 아시아나항공은 2조4000억원의 기금 사용을 승인받았다. 제주항공도 지난 10일 321억원의 자금 지원을 승인받았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기안기금의 활용률은 6.1%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이 실제 가져다 쓴 금액은 2400억원으로 승인액의 10%다. 대한항공과 통합하면서 나머지 기금을 활용할 가능성도 낮아져 활용률은 0.68%에 불과할 전망이다.
기안기금 활용률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까다로운 지원 조건 등 정책 실패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활용률이 낮은 가장 큰 이유는 국내 기업들이 코로나19 위기를 잘 버텨냈다는 데 있다. 기업들이 정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실적 개선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했다는 뜻이다.
정부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당초 우려와 달리 기업들이 팬데믹(대유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위기를 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지난 17일 열린 확대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경제계를 향해 “기업인들이 악전고투한 결과 위기 속 가장 선방한 나라라는 국제적 평가를 받게 됐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기안기금 지원 규정에 따르면 지원 대상은 항공, 해운, 자동차, 조선, 기계, 철강, 정유, 항공제조, 석유화학 등 9개 업종이다. 당초 기안기금 지원이 유력시됐던 대한항공은 전체 직원의 70%에 달하는 1만여 명이 돌아가며 한 달씩 직장을 쉬면서 고통 분담에 동참했다. 임원들도 급여를 최대 50% 반납했다. 올 상반기만 해도 연쇄 부도가 우려됐던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들도 대규모 유급휴직 및 유상증자 등 잇단 자구책을 통해 올 한 해를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항공업과 함께 기안기금 지원이 시급한 업종으로 꼽혔던 해운업도 당초 예상과 달리 선방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국적원양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은 최근 수년간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올해 10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할 전망이다. 앞서 올 2분기에는 21분기 만에 흑자를 냈다. 올해 영업이익이 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투자업계는 보고 있다.
조선, 기계, 철강업체 등 다른 업종들도 3분기부터 실적이 호전되고 있다. 조선업계는 고부가 선박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싹쓸이 수주를 통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조선 1위 지위를 유지했다. 노조도 힘을 보탰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 노사는 위기 극복을 위해 올해 임금 동결에 합의하면서 뜻을 함께했다.
정부와 산은은 내년에도 기안기금 지원 조건을 지금처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기안기금을 지원받기 위해선 △차입금 5000억원 이상 △300인 이상 근로자 △코로나19에 따른 직접적 어려움 발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기안기금은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며 “내년에도 국내 기업들이 선방해 기안기금 활용률이 제로(0)가 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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