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엔 상상도 못 했다. 영상 통화 한 번 안 해본 내가 노트북에 회사 사람들 얼굴을 바둑판처럼 띄워 놓고 회의하게 될 줄은. 연말이면 휴대폰 캘린더에 빼곡하던 송년모임이 모두 사라지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명동거리가 아니라 라디오에서만 듣게 될 줄은. 이 모든 일상을 바꿔놓은 코로나 바이러스란 놈의 위력을. 2020년 각자의 경험은 달랐겠지만, 모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중이다. 2020이란 숫자 위에 빨간색으로 큰 엑스(X)자를 그어 놓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는 올해를 최악의 해로 기억하는, 그래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들의 마음을 한눈에 들게 표현하고 있다.
2020년이 꼭 열흘 남았다. 여전히 ‘그놈’에게 쫓긴다. 영국에선 확산속도가 더 빠른 변종이 등장해 비상이다. 많은 나라가 봉쇄로 깜깜한 성탄절을 맞고 있다.
그래도 2021년을 내다보면서는 ‘희망’을 말한다. 예상보다 빨리 개발된 백신 덕분이다. 중국 푸단대 장용젠 교수팀은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하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의 RNA 염기서열을 해독해 지난 1월 11일 전 세계에 공개했다. 중국 정부의 바이러스 정보공유 금지 방침을 깨고서 한 일이다. 미국 과학저널 네이처는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과학적 전투’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의 캐스린 얀센 박사팀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RNA백신 개발에 착수해 210일 만에 임상시험에 성공했다. 영국과 미국 등에선 이미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체제와 국가 간 갈등을 뛰어넘은 공유의 힘이었다. 과학은 그 매개가 됐다.
얼마나 빨리 코로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백신 보급에 달려 있다. 상대적으로 방역을 잘해서, 백신의 안전성 검증 때문에, 비싼 값에 선구매했다가 예산 낭비로 문책당할까 봐,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백신 확보에 뒤처진 정부에 비판이 쏟아지는 까닭이다.
어느덧 국내 확진자가 5만 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도 700명에 달한다. 연일 확진자가 1000명 안팎으로 쏟아지자 그동안 잘 버텨온 의료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커져 간다. 백신 확보가 늦어질 경우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공무원, 직장인들이야 조금 길게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 하지만 장사를 제대로 못 하는 자영업자들이나 코로나 전투 최전선에서 뛰는 의료진에겐 하루하루가 피말리는 시간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내년 2~3월 중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공급이 시작되고, 화이자 얀센 모더나와도 계약이 조만간 체결될 것이라고 했다. 마스크 대란 때도 그랬지만, 언론이 지적하고 여론이 들끓으니 그제서야 총리를 중심으로 서두르는 모양새다. 정부는 내년 2~3월 시작해 인플루엔자(독감)가 유행하는 시기인 11월 전까지 접종을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집단면역에 이르기까지 빨리 접종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집단 면역이 생겨야 ‘사회적 거리두기’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백신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그때까진 다른 방법이 없다. 코로나 확산 속도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 서울시와 경기도, 인천시는 23일 0시부터 내년 1월 3일까지 수도권에서 ‘5인 이상 모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기로 했다.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큰 고비를 함께 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인내가 필요한 때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려울 때마다 국민들이 큰 힘을 발휘했다. 나랏빚도 국민이 갚고, 유조선 사고로 오염된 바다도 국민이 닦아냈다. 깜깜한 연말이지만, 그 국민이 ‘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새기며 2020년을 떠나보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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