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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정책오류·폐쇄성이 빚어낸 日 '성장상실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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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일본 경제는 평균 9.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고도성장기(1956~1973년), 성장률 4.2%의 중간성장기(1974~1990년), 1.0%에 머문 성장상실기(1991~2020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일본 내각부 자료, 실질 GDP 기준). 1980년대 후반의 거품경제기는 ‘일등으로서의 일본(Japan as No. 1)’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가 주목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일본의 위상은 1991년 거품경제 붕괴 후 지금까지 성장상실기 30년을 겪으며 크게 추락했다. 산업·재정·금융정책을 들어 추락 이유를 짚어보자.

우선, 산업정책에서 드러난 폐쇄성이다. 어떤 굴레를 두고 협업하는 아날로그 중심의 소재·부품·장비와 자동차 산업에서 일본 기업은 전통적으로 강점을 발휘해 왔다. 그 후 글로벌화와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조류가 바뀌었음에도 일본 정책당국은 기술 유출을 우려한다며 폐쇄적인 산업정책을 폈고, 그에 응한 기업 행동이 뒤따랐다. 샤프는 미에현(三重) 가메야마시(山市)에 울타리를 치고 ‘메이드 인 가메야마’ 제품으로 승부하겠다고 나섰지만, 맥을 못 추고 대만 기업에 흡수됐다. 다른 디지털 일본 기업들도 한국·대만·중국에 밀려 뒤처졌고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재정정책에서의 대응 실패도 성장 발목을 잡았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 후 일본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엄청난 재정자금을 쏟아부었지만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활용도가 거의 없는 도로, 국제회의장, 휴양시설 건설 등 낭비적 재정지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973년을 ‘복지원년’이라 칭하며 두터운 급부의 사회보장 제도를 설계했으나 공교롭게도 그해 고도성장이 막을 내렸다. 방대한 적자국채 발행을 통한 사회보장 재원 마련은 세대 간 불공평을 야기했고 성장 저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금융정책의 비정상적 운용이다. 일본은행은 최대의 국채 보유자인 동시에 최대주주로 돈을 풀어 금리를 낮게 유지한다. 금리가 낮으면 투자가 활성화돼 경제 상황이 좋아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定說)임에도 일본 경제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 기업이 유보금을 쌓아놓고 고수익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본 주가가 많이 올랐으니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일본은행이 주가 하락을 막으려고 주식(상장투자신탁, ETF)을 사들인 이례적인 개입이 있다. 소위 관제(官製) 주가다.

위에서 든 산업·재정·금융정책은 서로 얽혀 있다. 일본 정부는 지방 기업이 어려우면 재정 원조로 연명시켰고 그런 정책은 농어촌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정권 유지 전략과도 맞아떨어졌다. 지방의 고령화 진전은 심해져 1인당 복지지출도 많아졌다. 기업 연명과 복지지출 재원도 주로 국채 발행을 통해 이뤄졌다. 정부로서는 국채 이자 비용을 낮출 필요가 있었고, 손쉬운 방법은 일본은행이 국채를 사들여 돈을 풀고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었다.

성장상실기 30년은 정책 오류와 민간 부문의 수동성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종적 사회의 특성을 갖는 일본에서는 정부 정책 결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따르려 한다. 정부의 정책 오류에도 국민의 견제력이 미약하다는 뜻이다. 일본의 성장상실기 30년은 폐쇄적 정책 시행에 비판적 견제력이 작용하지 못하면 사회가 정체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열린 사고와 견제가 건실한 사회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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