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의 가혹행위에 시달려 탈영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20년간 옥살이를 한 70대 노인이 반세기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문병찬 부장판사)는 16일 군형법상 적진으로의 도주미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상은씨(74)의 재심에서 기존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박씨는 1969년 5월1일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 중 선임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군부대를 이탈했다.
박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군부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었고, 보초를 서던 인근 15사단 소속 군인에게 발견돼 군부대로 인계됐다.
박씨를 발견한 제102보안부대는 그가 북한으로 도주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내무반 내에 불법으로 구금하고 폭행하며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박씨는 같은해 6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형이 확정돼 20년간 복역하다가 1989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박씨는 누명을 벗기 위해 2018년 4월 재심을 청구했지만 당시 "재판 결과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라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청구가 기각됐고, 항고 끝에 지난해 9월 서울고등법원은 박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재심에서 검찰은 박씨가 이미 복역한 형기와 같은 징역 20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심 재판부는 확보된 여러 증거 자료와 진술 등을 토대로 박씨가 1969년 당시 월북하려 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고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박씨의 도주미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또 박씨가 구속영장에 기재된 것과 달리 102보안부대 내무반에 구금돼 있었고,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불법 구금을 당하고 가혹행위를 당한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설령 법정에서 피고인이 적진으로 도주하려고 했다고 자백하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박씨의 동선과 날씨 등을 고려했을 때 "목숨을 끊으려다 부대로 복귀하던 중 15사단 수색중대에 인계됐다는 피고인의 진술에 설득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탈영 후 박씨의 동선이 북쪽이 아니라 서쪽이고 1969년 5월 당시 비가 내려 길을 찾기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조회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박씨는 기자들과 만나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면서 "앞으로는 나 같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재판부가 진심을 알아주고 무죄를 선고해 고맙다"면서 "두 아들에게 마음의 자유를 준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보배 한경닷컴 객원기자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