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 GC(파71)에서 15일(현지시간) 열린 제75회 US여자오픈 최종 4라운드.
김아림(25)은 동반자에게나 하는 ‘굿샷’을 자신에게 두 번이나 외쳤다. 첫 굿샷은 16번홀(파3)에서 나왔다. 과감히 핀을 보고 친 티샷이 홀 1m 옆에 떨어진 것. 17번홀(파4)에서도 버디를 낚은 그는 18번홀(파5)에서 세 번째 샷을 날린 뒤 또 한번 ‘굿샷’이라고 소리쳤다. 119야드 남은 상황에서 피칭 웨지로 과감히 디벗을 떠내더니 공을 홀 3m 부근에 붙였다. 3연속 버디를 성공한 순간 김아림은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한국의 ‘장타 여왕’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최고 권위의 US여자오픈을 정복한 순간이었다.
최다타수차 역전 우승 타이 기록
김아림은 이날 대회 최종라운드에서 마지막 3연속 버디를 포함해 4타를 줄여 최종합계 3언더파 281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박세리(43)를 시작으로 한국 선수가 이 대회에서 들어올린 열한 번째 우승 트로피. 박인비(32)가 이 대회에서 2승을 보유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는 김아림이 열 번째다. 지난해 ‘핫식스’ 이정은(24)이 정상에 오른 데 이어 2년 연속 대회장에 태극기가 펄럭였다.김아림은 US여자오픈에 처음 출전해 정상을 정복한 다섯 번째 선수가 됐다. 가장 최근 기록은 2016년 대회 전인지(26)의 우승이었다. 선두에 5타 뒤진 공동 9위로 출발한 김아림은 대회 최종일 최다타 역전 우승(5타 차) 타이기록도 세웠다. 대회 최종일에서 5타 차를 뒤집은 사례는 이전까지 6명에 불과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2승을 거둔 김아림은 자신의 1부 투어 세 번째 우승을 LPGA투어 최고 대회에서 거두게 됐다. 우승상금은 100만달러(약 10억9000만원). 한국에서 2승으로 모은 우승상금(3억2000만원)의 세 배를 넘는 액수다. 국내에서 함께 뛰는 김지영(24)으로부터 격한 ‘샴페인 축하’를 받은 김아림은 “오늘 티박스가 앞당겨진 것을 보고 자신이 생겼다”며 “언젠가 기회가 올 줄 알았지만 지금은 머리가 하얗다”고 말했다.
회원 자격 없이 LPGA투어 대회서 34번째로 우승한 김아림은 코로나19로 지역 예선을 치르지 못한 미국골프협회(USGA)가 출전 자격(세계랭킹)을 확대하면서 이 대회 출전 명단에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출전 기회를 우승으로 연결한 그는 LPGA투어 직행 티켓까지 손에 쥐었다. LPGA투어는 비회원 선수가 우승하면 그해 잔여 경기와 이듬해 시즌 출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시즌이 파행 운영되면서 김아림은 LPGA투어 결정에 따라 2022시즌까지 출전권을 보장받을 수도 있다. 다만 김아림은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LPGA투어 진출 여부를 결정해 투어 측에 알려야 한다.
미국에서도 장타 뿜은 ‘토종 장타왕’
KLPGA투어 3년 연속 장타왕 출신인 김아림은 나흘 평균 255.8야드를 쳐 장타 부문 전체 4위에 오르며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뽐냈다. 멀리 보내니 그린 적중률도 나흘 평균 전체 5위(69.44%)에 오를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멀리 치고 그린 근처에서 웨지로 처리하는 브라이슨 디섐보(27·미국)의 이른바 ‘봄 앤 가우지(Bomb & Gouge)’를 연상케 했다.그린 적중 때 퍼트 수도 1.78타로, 모든 부문에서 우위를 점했다. 김아림의 스승인 김기환 코치는 “김아림 선수는 항상 (자신에 대해) 물음표가 많았다”며 “이번 대회를 앞두고 그의 장기를 살리도록 머릿속을 정리해줬다. 보디 트레이닝 등으로 체력을 키워 실전에서 바로 쓰도록 했다”고 말했다.
3라운드까지 단독 선두였던 시부노 히나코(22·일본)에 5타 뒤진 채 출발한 김아림은 5번홀(파5)과 6번홀(파4), 8번홀(파3)에서 버디를 잡아 시동을 걸었다. 10번홀(파4)과 11번홀(파4)에서 연속 보기가 나오며 흔들렸으나, 마지막 세 홀에서 연속 버디를 몰아쳐 경기를 뒤집었다. 11번홀까지 4타를 잃고 무너진 시부노 대신 새로운 우승 후보로 떠오른 에이미 올슨(28·미국)마저 16번홀에서 보기를 적어내면서 김아림의 우승 가능성이 높아졌다. 올슨은 버디가 꼭 필요했던 17번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을 벙커에 넣으면서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세계랭킹 1위 고진영(25)이 2언더파를 적어내면서 한국 선수가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가졌다. 올슨은 이틀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도 정신력으로 우승 경쟁을 이어갔으나 김아림의 기세를 꺾진 못했다. 메이저 2승에 도전하던 시부노는 3타를 잃고 합계 1언더파 4위로 밀려났다.
박인비는 2오버파 공동 6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정은(24)도 박인비와 나란히 6위에 올라 디펜딩 챔피언의 체면을 지켰다. 3타 차 공동 3위로 역전을 노리던 김지영은 이날만 9타를 잃고 무너져 8오버파 공동 30위에 그쳤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