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
작년 말 상사에서 영업 업무를 하다 어렵게 저비용항공사(LCC)로 이직한 승무원 A씨. 그는 요즘 최승자 시인의 시 ‘서른’의 이 구절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A씨는 작년 초부터 어릴 적 꿈을 이루겠다며 항공사 승무원에 도전했다. 면접에서 수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서른이 되기 전인 작년 말 입사했다.
기쁨도 잠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이직 석 달 만에 일이 완전히 끊겼다. 무급 휴직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시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A씨는 “외국어가 강점이어서 관광이나 무역 관련 업종을 우선 알아보고 있다”며 “다만 이들 업종 역시 모두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아 인력 수요가 많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A씨는 “이렇게 다닐 수도 없고, 이렇게 퇴사할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왔다”고 했다.
코로나19 유행이 길어지면서 직장인들의 이직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관심이 높아진 K바이오 회사들은 인력난을 호소하며 스카우트 경쟁이 한창이다. 관광·항공 업종 종사자들은 다른 업종으로 옮기는 ‘엑소더스(대탈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요즘 직장인들의 이직 풍경을 들여다봤다.
돈 때문에 퇴직한 김 과장
직장인 사이에서 ‘평생직장’은 무의미한 단어가 됐다. 근무 기간과 관계없이 직장이 ‘나와 맞지 않는다’거나 더 좋은 기회가 생기면 주저없이 그만두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특히 돈에 대해선 인정사정이 없다.
지난 7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SK바이오팜 직원들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 직원들은 자사 주식을 평균 1만1820주, 5억7918만원어치씩 배정받았다. 주가가 한때 공모가의 다섯 배가 넘으면서 1인당 20억원 이상의 차익을 얻었다.
문제는 상장 후 1년간 주식을 팔 수 없다는 것. 주식을 팔아 시세 차익을 챙기고 싶은 직원들은 줄줄이 사표를 내기 시작했다. 전 직원의 10% 정도인 20여 명이 퇴사했다. 대부분 가족이나 자신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이 회사를 다니다 바이오벤처 G사로 옮긴 한 직원은 “내년까지 주가가 얼마나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이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다닐 필요가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출신은 바이오업계에서 귀한 몸”이라며 “퇴사자 대부분 더 좋은 조건으로 바이오 벤처로 갔다”고 귀띔했다.
바이오벤처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던 김 과장은 얼마 전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홍보팀에 근무했던 직원들이 모두 이직하면서 홍보 업무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 명이 하던 업무를 수개월 동안 혼자 처리했다. 김 과장은 “업무에 적응하랴, 쌓이고 쌓인 업무를 처리하랴 정신이 없다”며 “‘사표를 내겠다’며 배수진을 치자 그제야 경력 직원 한 명이 충원됐다”고 말했다.
이직으로 인생 반전 노렸지만…
이직은 직장인이 지닌 최고의 무기다. 대기업 근무 경력을 앞세워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으로 옮겨 도약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가량은 ‘경력 관리를 위해 이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했다.특히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중견 IT 서비스 업체에서 일한 최 과장은 지난해 한 관광 관련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O2O(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를 준비 중인 업체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연봉은 절반으로 줄지만 꽤 많은 스톡옵션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회사가 휘청이면서 진퇴양난이다. 준비했던 서비스는 출시 일정이 기약 없이 미뤄졌다. 후속 투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퇴사하고 인터넷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 과장은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도전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를 기회 삼아 새로 도전하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한 대형 회계법인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던 김 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4월 식품 관련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 만류했다. 그때마다 김 과장은 소위 ‘라인(줄)’을 잘 잡아 승승장구하는 능력없는 선배들에게 환멸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는 “이 회사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고 다양하다”며 “회사가 상장하면 한방에 보상받을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국내 굴지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이 대리도 밤마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경력직 채용을 하고 있는 인터넷 은행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대리는 “느린 의사 결정과 변화에 소극적인 모습에 지쳐 이직을 결심했다”며 “SK바이오팜 직원들처럼 주식시장 상장과 함께 큰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관광업계는 비자발적 이직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관광·항공업계에는 인력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한 대형 여행사에 다니는 박 대리는 ‘비자발적’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기회가 있으면 이직하라고 권장한다. 하지만 여행사 경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업종이 마땅찮아 밤잠을 설치고 있다. 박 대리는 “IT업계로 방향을 정하고 자격증 취득 준비로 강의를 듣고 있지만 막막하기만 하다”며 “10년간의 경력이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져 씁쓸하다”고 말했다.이직이 많지 않은 건설업계에서도 이직은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직무 중심으로 경력직을 상시 채용하는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건설사에서 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 업무를 담당했던 김 과장은 팀장을 비롯해 팀원 전원과 함께 경쟁사로 옮겼다. 그는 “연봉이 직전 회사 대비 20%가량 올랐다”며 “동고동락한 다른 팀원을 뒤로한 채 이직하는 건 힘들지만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