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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패권 쟁탈…전쟁은 수익성 높은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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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복근’이 선명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여심을 흔드는 카리스마의 레오니다스 왕은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7년 영화 ‘300’의 상징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란 광고 카피로 유명한 이 영화는 BC 480년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의 격전지였던 테르모필레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고대 페르시아 전성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패퇴해 죽은 다리우스 1세의 복수를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를 제압한 뒤 헬레스폰투스해협(현재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들이닥쳤다. 이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1차 방어선으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 포진했다.

영화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불굴의 용기로 방어하다 전멸하고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다르다. 선봉에 선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 300명 외에 다른 폴리스들이 보내온 4000명의 병사가 후방을 맡았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을 사흘간 저지했지만, 그리스의 배신자가 페르시아군에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줘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레오니다스 왕은 떠날 병사들은 떠나게 하고 스파르타 300명, 테스피아이와 테베의 병사 등 1400명으로 맞섰다. 그러나 급습을 당한 후방의 테베 병사 400명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앞뒤로 몰려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원 전사했다.

테르모필레 협곡을 통과하면서 군사 2만 명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평원을 지나 아테네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시민 전부를 살라미스섬으로 강제 이주시켜서 아테네에는 그리스 연합함대만 남아 있었다. 연합함대는 수적 열세에도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해협으로 유인해 궤멸시켰다.

다 이긴 전쟁을 역전당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분노했지만, 때마침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아시아로 퇴각했다. 페르시아가 남겨둔 육군 20만 병력은 이듬해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패하자 그리스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병력 수가 승패를 가르진 않는다
대제국 페르시아는 작고 만만한 그리스연합보다 병력이 10배나 많아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20만 대군이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에 막혀 사흘간 지체했고 결국 패퇴했다.

페르시아군은 제국 각지에서 강제 동원된 다국적 군대였다. 먼 거리를 이동해 보급에도 곤란을 겪었다. 반면 그리스는 애국심 투철한 자유민으로 구성되었다. 병력의 질이 달랐다. 전투지의 지리와 물살을 잘 아는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다.

양측은 전술과 장비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페르시아는 당시 세계 최강인 기마대와 궁병으로 적을 제압하는 전술을 썼다. 기마대는 평지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산과 계곡이 많은 그리스 땅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그리스의 전법은 백병전이다. 길이 4~5m에 달하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200여 명이 직사각형 밀집 대형으로 전진하면 마치 고슴도치 모양의 탱크와도 같았다. 병사들은 청동으로 된 투구, 가슴과 정강이 보호대로 중무장했다. 자유민은 병역을 특권으로 여기고, 도망치는 것을 가장 비겁한 행위로 간주했다.

경제력 면에서는 제국 곳곳에서 공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페르시아가 유리했지만, 그리스도 아테네 부근 라우리온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급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다. 살라미스해전도 아테네가 미리 축조해둔 200척의 전함이 없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고대에 가장 남는 장사는 전쟁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은 BC 5세기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말과 낙타 외에는 변변한 운송 수단이 없던 시절, 육상 교역보다는 해상 교역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해상 교역이 중요했던 것은 지중해 연안의 생산물이 지역마다 편중되어 서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교역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지중해를 누빈 것은 최초의 상업 민족인 페니키아인이었다. 그들은 별자리를 보며 야간 항해도 했을 만큼 항해술이 뛰어났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곳곳을 누비며 식민 도시를 만들고, 이베리아반도 끝의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페니키아인이 BC 13세기 상거래 기록을 위해 발명한 문자는 알파벳의 모태가 되었다.

BC 814년 페니키아의 도시인 티레의 디도 공주가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으로 이주해 식민지 카르타고를 세웠다.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무역을 주도하면 부를 쌓았다.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세 차례 포에니전쟁 끝에 패망하기까지 700년을 존속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BC 8세기 들어 해양으로 진출했다. 폴리스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립했지만, 같은 언어를 쓰고 ‘헬라인(그리스인)’이라는 동질감이 있었다. 고대 올림픽은 BC 776년 시작되었는데 폴리스 간에 전쟁을 벌이다가도 멈추고 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는 토질이 식량 생산에 부적합해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 남부에 농업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먼저 카르타고와 충돌했다.

흑해 연안, 이집트, 인도 서부까지 광활한 내부 교역망을 확보한 페르시아가 지중해 해양 패권에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리스가 해상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탐냈던 것이다. 고대사는 곧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이 질서였던 시대에 전쟁은 위험하지만 가장 수익 높은 경제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민주정치 도시국가 연합인 그리스가 대제국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이 민주주의의 우월함 때문이라는 후대의 한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까.

② 페르시아에 승리한 그리스, 카르타고에 승리한 로마가 모두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해서 ‘그리스 로마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을까.

③ 시리아 내전이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젠 분쟁처럼 최근 빚어지고 있는 각종 분쟁도 경제적 원인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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