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고혈압도 아니고 당뇨도 아닌데… 그래도 밖에 많이 돌아다니는 직업이니까 나도 고위험군이라 볼 수 있나?'지난 24일 기자는 서울 종로구 한 종합병원을 찾아 인플루엔자(독감) 예방접종 주사를 맞았다. 성인이 된 후 처음인 독감 예방접종이었다. 로비에서 뽑은 번호표는 870번. 접수창구의 번호는 857번으로 기자 앞에 13명의 대기자가 밀려 있었다.
'우선 접종 대상자도 아닌데 예방접종 해도 되는 건가.'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순서를 기다렸다.
질병관리청 고시 '예방접종의 실시기준 및 방법'에 따르면 우선 접종 대상자는 독감 바이러스 감염 시 합병증 발생이 높은 고위험군, 고위험군에 독감 바이러스를 전파할 위험이 있는 대상자, 집단생활로 인한 인플루엔자 유행 방지를 위한 접종대상자다. 이를 고려해 만 62세 이상과 임신부, 생후 6개월~만 18세 이하 어린이·청소년 대상으로 무료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딸에게 재촉하고 회사 동료들과 단체 접종하고
병원을 둘러보며 예방접종 하려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하루 빨리 접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부 김모 씨(58·여)는 "예년처럼 10월 중순에나 예방접종 할까 하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이니 빨리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일찍 방문했다"고 했다. 그는 지방에서 자취한다는 20대 딸에게 전화해 "시간 되는대로 빨리 주사 맞아라. 병원에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며 "가격 상관 말고 가까운 병원에서 꼭 맞아라"라고 거듭 당부했다.근무시간임에도 회사 직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예방접종을 하고 가는 사례도 있었다. 직장인 김모 씨(38)는 "회사가 병원과 가까워 양해를 구하고 다 같이 예방접종 하러 왔다"며 "10명이 단체로 맞으면 인당 2000원씩 할인해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회사에서 비용을 지원해준 건 아니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업무시간에 다녀온다고 해도 흔쾌히 허락해줬다"고 말했다.
일행인 정모 씨(34) 역시 "한 공간에서 오래 같이 생활하는 사이인데 한 명이 코로나19나 독감에 걸리면 서로 손해 아니겠냐. 다 함께 접종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람 몰려 내과·소아과·산부인과·이비인후과로 환자 분산
병원 직원은 접수를 마친 기자를 산부인과로 안내했다. 임산부도, 임신 예정 여성도 아닌데 왜 내과가 아닌 산부인과로 안내하느냐 묻자 직원은 "독감 예방접종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내과나 소아과에서만 예진을 할 수 없다. 이비인후과와 산부인과에서도 예진을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남성 방문자들까지 산부인과에서 예진을 보는 다소 '황당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트윈데믹(Twindemic·코로나19와 독감의 동시 유행)' 우려로 예방접종 수요가 많아진 것이 원인이었다. 앞서 방역당국은 트윈데믹을 막기 위해 독감 예방접종을 강력 권고했다. 독감 환자 진료·치료시 코로나19에 준하는 방역태세를 준수해야 하는 만큼 두 질병이 동시에 유행하면 의료 체계에 과부하가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독감과 코로나19에 중복 감염된 사례는 이미 발생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난 9일 "독감 검사와 코로나19 검사를 했을 때 2개 모두 양성이 나온 사례들이 있었다. 증상이 더 치명적인지는 아직 추이 관찰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보건당국은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독감 국가예방접종 대상자를 지난해 1381만명에서 올해 1900만명으로 대폭 확대했다.
국가사업으로 소진될 백신의 양이 늘어난 만큼 유료 접종 대상자들 물량이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한 조달업체가 백신을 상온에 노출하는 일까지 빚어져 백신 안전성도 문제가 됐다.
백신은 2~8도의 적정 온도를 유지한 채로 옮겨져야 안전성 및 효능이 유지되는데 상온에서 백신을 옮긴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식약처는 적정온도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품을 선별해 효능과 안전성을 실험하고 있다. 결과는 다음달 초중순에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해당 백신을 전량 폐기해야 할 수도 있어 불안감이 커지는 모양새다.
"무료 백신 못믿겠다"…유료 접종하는 국가예방접종 대상자
보건당국 발표를 못 믿겠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4살 중학생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은 박모 씨(44·여)는 "아들 무료 접종기간은 다음달 15일부터다. 사고도 있고 해서 그냥 유료로 맞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건당국이 '안전하다'고 발표한다고 한들 어떻게 믿겠나"라고 했다.
다음달 19일부터 독감 예방접종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9살 여아와 함께 예방접종 하러 온 한모 씨(37·여) 역시 "10월 중순 '해당 백신은 안전하다'라는 보건당국 결과가 나오면 그 (상온 노출) 백신을 맞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해당 물량이 병원에 풀리기 전에 아예 유료 접종을 맞는 게 낫겠다 싶다"고 했다.
실제로 정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검사 결과를 보고 결정하자면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란 뉘앙스를 주고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23일 "해당 백신이 실제 냉동차에서 벗어나 운반된 시간은 1시간, 10분 이내인 것 같다"며 "세계보건기구(WHO)가 말하는 백신 상온 노출 안전기간보다 짧아 위험한 것 같진 않다"고 설명했다. WHO의 '허가된 백신의 안전성 시험 자료'에 따르면 독감 백신은 25℃에서 2∼4주, 37℃에서 24시간 안정하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문제가 된 백신을 전수 검사하는 것이 아닌 표본 검사를 진행하는 데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현재 식약처는 문제가 된 업체가 유통한 독감 백신 500만 도즈(1회 접종분) 중 0.015%인 750도즈만을 대상으로 유효성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모든 백신을 다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표본을 검사한다면 어떤 판단 기준으로 얼마나 정확히 검사가 될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사용해도 좋다는 결과를 내놓고 큰 부작용이 없다 한들 백신 효과까지 제대로 보장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미경 한경닷컴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