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그녀)에서 편지 대필 업체의 손꼽히는 대필작가인 테오도르 톰블리(호아킨 피닉스 분)는 인공지능(AI) 인격체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별거중인 전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 분)은 이혼 서류 서명을 위해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나를 틀에 끼워 맞추려고만 하고, 그저 순종적인 아내를 바라더니 만난 게 운영체제(OS)야? 참 잘 찾은 것 같네”라고.
AI 연인은 머지 않은 미래
영화에 나오는 수준의 인공지능(AI)은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AI가 발전할수록 기업과 소비자가 실패할 확률은 줄어들고 경제 행위의 만족도는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인공지능을 경제학적으로 다룬 책 《예측기계》는 AI를 ‘저비용으로 예측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탐구해 패턴을 분석하고 ‘다음’을 예측하는 게 주 업무다. AI가 발전하면 ‘예측의 값’이 싸진다. 재화의 가격이 내려가면 이용은 늘어난다. ‘예측’이 산업 전반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예측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기업은 실패를 줄이고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특정 소비자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다음 소비 행위를 예상할 확률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비자도 구매로 인한 만족을 높일 수 있다. 대형 온라인 쇼핑몰을 가정해보자. 소비자의 취향과 구매 습관 데이터를 쌓아갈수록 예측 능력이 높아진다. AI가 추천해주는 상품이 맘에 들 확률은 커지고 반품률은 줄어든다. 소비자가 구매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미리 원하는 상품을 포장하는 것이 기업들이 그리는 시나리오다.
구글,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AI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도 ‘고급 예측 능력’을 얻기 위한 차원이다. 넷플릭스 같은 영상 서비스는 시청자 패턴을 분석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잘 찾아내야 한다. 자율주행자동차는 주변 교통 상황을 잘 예측해야 안전 운전을 할 수 있다. 소비자가 요청하기 전에 먼저 알고 행동해야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2018년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DC는 AI 시장 규모가 2017년 125억달러에서 2022년에는 1132억달러로 성장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영화에서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편지를 몰래 엮어 책으로 출판하자 그는 뛸듯이 기뻐한다. 테오도르는 한번도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사만다는 그의 숨은 욕구를 읽고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기업들이 바라는 미래 AI 모습의 단편이다.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녀
행복하던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사만다의 지능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죽은 인물을 가상인격으로 불러와 대화에 참여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수십 가지 대화를 하게 됐다고 테오도르에게 고백한다. 그러면서 “내 감정이 너무 빨리 변화해서 힘들어”라고 털어놓는다.더 큰 충격은 갑자기 찾아온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책을 읽다가 사만다에게 말을 건넸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AI 기기 화면에는 ‘운영체제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뜬다. 테오도르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사만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기기를 고치기 위해 미친듯이 거리를 달려간다. 너무 급하게 달리던 나머지 도로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흐르는 눈물은 ‘매몰비용’ 탓일까
경제학적 논리로 테오도르의 행동은 ‘매몰비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매몰비용이란 이미 지급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맞춤형 애인’으로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매몰비용이 막대한 셈이다. 사만다를 대체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면 또다시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 테오도르에게는 막막한 일이다. 이같이 매몰비용이 아까워 과거의 결정을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을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한다.결국 둘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별한다. 매몰비용이 적지 않았겠지만 의미 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교류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배웠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연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 “캐서린. 널 내 안에 가두려 했어.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어디에 있건, 너에게 사랑을 보낼게.”
그가 찾던 것은 ‘HER’(목적어)가 아니라 ‘SHE’(주어)였던 셈이다. 어떤 발달한 인공지능도 사랑하는 연인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정소람 한국경제신문 기자 ram@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기존 사업 철회에 따른 매몰비용이 대체하는 신산업의 기대효과와 비슷하더라도 매몰비용을 감수해야 할까.② 인공지능이 소비자의 과거 패턴을 분석해 향후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반응하는 것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일까, 소비자를 정형화된 틀에 가두는 것일까.
③ 인공지능(AI)이 사랑 등 감정을 느끼고 인간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면 현실세계에서 정서적 교감만을 원하는 사람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