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 정착’을 국가안보전략의 최우선 목표이자 과제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순행 중이라고 믿고 있다면 이는 요란한 정치술적 허장성세(虛張聲勢)로 말미암은 착시일 뿐이다. 그 실상은 거꾸로 가고 있다.
2018년 3월 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백악관 앞마당에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고, 어떤 실험도 자제할 것이며, 한·미 연합훈련의 지속을 이해하고 있다”며 “대한민국, 미국, 우방국들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북한이 그들의 언사를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줄 때까지 압박이 지속될 것이라는 단합된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이 장대한 선언은 신기루였는가. 그날 이후 한국은 ‘한반도 운전자’에 이어 ‘중재자’를 자임하며 이상주의와 평화주의적 접근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북한의 거의 모든 언행에서 진정성 있는 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권의 핵심 인물들은 자기 반성이 없고 주된 원인을 북한이 아니라 미국 탓으로 돌리는 여론전을 펴고 있다. 이런 흐름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로 끝날 것이 뻔하다.
김정은의 길은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의 ‘노딜’을 계기로 명백해졌다. 북한의 목표는 핵 포기를 결단한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한·미 동맹이 수용할 수 없는 상응 조치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시간을 끌다 핵 보유국 지위를 굳히는 데 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경제 제재 해제에 이어 한·미 연합훈련 영구 중단을 요구한 것은 첫 번째 수순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북한의 속셈을 아직도 읽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그들의 전략적 게임에 내재된 위험과 함정을 알고도 침묵한다면 온 국민과 세계인을 속이는 것이다.
이제라도 대북정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개별 관광, 60개 도시 자매결연 등 아이디어가 속출하지만 북한은 냉랭하다. 북한은 ‘큰돈’이 필요한데 한국은 ‘푼돈’을 주겠다며 호들갑 떤다고 비웃는 격이다. 한국은 ‘스냅백 제재 완화’를 만지작거리지만 미국은 조 바이든이 집권해도 동의할 리 없다. 북한에 시간만 더 줘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통제력을 벗어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플랜A’를 유지하면서 ‘플랜B’를 가동해야 한다. 첫째, 대화의 문은 열어 놓되 제재의 ‘뒷문’은 단속해야 한다. 추가 제재를 준비하고 인권 문제도 제기해야 한다. 최근 김정은이 ‘실패’를 공식 인정할 정도로 악화된 경제 상황에 코로나19 감염과 홍수 피해까지 겹쳐 북한 주민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영국에 이어 미·북 대화를 중재했던 스웨덴 공관도 철수해 북한의 고립은 더 심해지고 있다. 어느 순간 북한이 자체 통제력을 상실해 한국까지 혼란에 빠뜨릴지 모를 일이다.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한 전략적 준비는 온전한지 걱정이다.
둘째, 북한은 20~6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심각한 실존 위험은 점점 더 가중되는 추세다. 북핵 위협 억제와 폐기 강요를 위해 한·미 핵공유협정 체결은 국가의 의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미국 확장억제정책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주도적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2016년 말 합의한 한·미·일 잠수함 추적 훈련이 표류 중인 이유도 밝혀야 한다.
셋째, 국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재정비해야 한다. 북한의 소형화된 핵무기 또는 핵물질이 제3의 행위자 손에 들어가면 재앙이다. 한반도 주변 지·해·공 반출 경로에 대한 감시·정보 공유와 차단 작전이 조밀해야 한다.
유독 문재인 정부 내에서는 견제와 균형 원리가 작동을 멈춘 듯하다. 국가안보 문제를 정치·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어공’ 세력이 ‘늘공’의 건전한 비판을 외면하는 분위기에서는 미망(迷妄)에서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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