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부조'로 유명한 전병현 작가(63)는 거의 매일 새벽이면 서울 평창동 집에서 경기도 광주 곤지암 농장으로 향한다. 그는 작업을 위해 직접 닥나무를 재배하고 채취해 한지를 만든다. 처음에는 한지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했으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기가 어렵자 직접 한지를 만들기로 했다. 지금은 닥나무 껍질로 죽을 쑤고 한지를 떠내는 기술이 전문가 이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이 있다. 풀꽃, 야생화 전문가가 된 것이다. 한지용 닥죽을 쑬 때 점성 조절을 위해 황촉규(닥풀) 뿌리가 꼭 필요해서 심었는데 노란 꽃이 참 예뻐서 그리기 시작했다. 눈길은 이내 다른 풀꽃으로 번졌다. 달맞이, 엉겅퀴, 줄풀, 노루오줌, 매발톱, 부처꽃, 비누풀꽃, 꽈리 모양의 풍선초, 상사화, 맨드라미…. 그가 자신의 농장에서 보고 기억하는 야생 들꽃만 100종을 넘어선다.
3일 서울 돈화문로 나마갤러리에서 개막하는 '전병헌 전'은 그의 이런 작품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 작품은 총 55점. 화사하고 상큼한 풀꽃, 나무꽃 그림과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하는 립스틱 그림 등을 갤러리 1~3층에 차례로 걸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코로나 블루'(우울함)를 날려버릴 만하다.
갤러리 1층에 들어서면 여리지만 강인한 풀꽃들을 그린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흰색 바탕의 묵직한 마티에르에 볼륨이 살아있는 초록색 풀잎, 노랑·빵강·보라·자주색 등의 꽃들이 미풍에 살랑거리는 느낌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전 작가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풀꽃을 그리게 됐다"고 했다.
전 작가는 2001년부터 자신의 인터넷 카페에 그림과 짧은 에세이를 담은 '싹공일기'를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싹공'은 초하루 삭(朔), 빌 공(空)을 쓰는 그의 아호에서 따온 제목이다. 차면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다시 차는 달처럼 살겠다는 의미다.
2007년 풀꽃 작업을 시작하면서는 매일 들꽃 일기를 올렸고, 여성 팬들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카페 회원이 8만명을 넘었고, 연재한 작품으로 전시도 두 차례 열었다. 책도 세 권이나 냈다. 전문가답게 그는 "수레국화는 여리여리해서 예쁘고, 접시꽃은 홑접시든 겹접시든 화려하다"며 "코로나 블루를 날려버리자는 뜻에서 깨끗하고 밝은 느낌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2층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스테디 셀러인 '한지 부조' 작품 '블로섬(Blossom)' 연작들이 기다린다. 둔탁한 듯 하면서도 한지 부조위에 화사하게 핀 매화, 진달래, 산수유, 동백, 개복숭의 꽃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달항아리에 심은 매화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신두리 해안가에 갯매가 핀 풍경도 압권이다.
블로섬 연작의 작업 과정은 복잡하고 길다. 먼저 꽃이나 나무 등의 형태를 흙으로 빚고 석고를 부어 틀을 만든다. 그 다음 한지죽을 틀에 붓고 물기를 배면 뻥튀기 과자 같은 느낌의 한지 부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손으로 찢어서 캔버스에 붙이고 황토, 돌가루를 입힌다. 돌가루가 마르기 전에 먹이나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목탄 드로잉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전 작가는 "작품마다 최소 6개월 이상 걸리는 고행(苦行)이지만 위작이 나올 걱정은 없다"며 껄껄 웃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따로 목탄으로 그린 '노스탤지어' 연작 10여 점도 2층에 걸었다. 작가의 고향인 경기 파주의 옛 풍경을 담은 소품들이다. '우신상회' '파주상회' '장터상회' 같은 간판과 복사꽃이 핀 초가집, 산속 오두막 등의 풍경이 정겹고 아련하다.
3층에는 여성용 화장품인 립스틱으로 소비사회의 욕망을 투영한 '루즈 스토리' 연작들이 걸려 있다. 붉은 색 계통의 화려한 얼굴 그림이 많은데 작가 자신과 딸, 친구의 딸 등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전 작가는 "3년 전 SNS를 통해 전 세계 여성들에게 쓰지 않는 립스틱을 보내주면 좋은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제안했는데 1800개 이상의 립스틱을 보내왔다"며 "유명 화장품 회사와 백화점 등에서도 립스틱을 제공해줬다"고 말했다.
립스틱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그린 그림들은 왁스 성분이 날아가면서 화사하면서도 파스텔처럼 부드러운 느낌이다. 이전 전시에서 소개했던 눈감은 표정, 민화에서 차용한 물고기·자라·오리·화초·문자도 등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여성의 추상표현주의적 실루엣이 살아있는 100호 대작은 정열적이다. 전 작가는 "코로나 19로 전시를 못하지 않을까 걱정하다 오히려 마스크로 가려진 여성들의 입술을 떠올리며 립스틱 그림을 완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고3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전 작가는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고졸 학력으로 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됐다. 이후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주제와 소재, 재료와 기법 면에서 끊임없이 실험작을 선보이며 주목 받는 중견 작가로 자리잡았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