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거대한 협상 테이블입니다. 특히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글로벌 협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국민 개개인의 협상력을 높여야 국익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책을 썼습니다.”
주페루 대사, 주스페인 대사를 지낸 박희권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63·사진)는 지난 2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2020 세종도서’에 선정된 책 《쉘 위 니고시에이트》를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쉘 위 니고시에이트》는 1979년부터 2018년까지 39년간 외교관으로 일한 박 교수가 세계 각국을 돌면서 경험한 국제 협상을 바탕으로 지난해 펴낸 ‘글로벌 협상 입문서’다. 지난 7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우수도서 선정사업인 세종도서에 뽑혔다.
박 교수는 외교부 조약과장, 국제법규과장, 조약국장 등을 거치면서 30년 넘게 일본과의 독도 분쟁을 다룬 동북아 국제분쟁 전문가다. 한·일어업협정 및 중국과의 이어도 문제 협상 실무를 총괄했다. 박 교수는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는 2020년 속 한반도는 국권을 잃은 100년 전 대한제국과 지정학적 여건이 사실상 똑같다”며 “개인과 국가 모두 그 어느 때보다 협상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 상황에서 《쉘 위 니고시에이트》가 아직은 토론·협상 문화가 부족한 한국 사회에 작은 반향을 일으키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외교관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 협상으로 2012년 페루대사 시절 국산 훈련기 KT-1 20대를 페루에 수출한 경험을 꼽았다. 당시 중남미 공군 훈련기 시장은 브라질이 독점했다. 브라질 독점 체제를 깨뜨리고 한국이 중남미 최초로 훈련기를 페루에 수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 교수의 역할이 컸다.
“한국이 페루에 훈련기를 수출하려고 하자 페루에 있는 친(親) 브라질계 야당, 언론, 시민사회의 집중포화가 쏟아졌어요. 현지 신문과 TV에서는 매일같이 한국을 부정부패한 나라로 묘사했습니다. 사실과 무관하게 말이죠.”
악화된 여론으로 수출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상황을 반전으로 이끈 것은 그의 기자회견이었다. “정말 다 포기한 상황에서 진심이라도 전하자는 생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그러고는 말했죠. 전쟁 폐허 속에서 기술 강국으로 일어선 한국은 KT-1 수출과 함께 기술 이전을 통해 1차산업에 집중하고 있는 페루가 강국으로 거듭나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이죠. 진심으로 호소했더니 거짓말처럼 여론이 뒤집혔어요.”
박 교수는 KT-1 사례를 통해 협상 과정에서의 진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과도한 감정 표출을 삼가는 ‘자제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협상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반드시 상대방의 보복이 뒤따른다”며 “정부는 스스로를 서희(고려시대 외교 협상가)로 칭할 게 아니라 수많은 서희를 조용히 육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결과를 두고 고려시대 문관 서희가 거란으로부터 강동6주를 받아낸 외교 담판에 빗대어 “꿀릴 것 없는 협상판”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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