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아선 금융회사가 주식회사인지, 사회공헌 단체인지 모르겠네요. 금융업의 본질이 뭔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최근에 만난 한 금융지주 임원은 “금융산업이 정부의 정책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어 보자’는 의욕 섞인 구호도 나왔지만 어느새 쏙 들어가버렸다”며 “정부로부터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기도 빠듯하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배경은 “좋은 일 좀 하라”는 금융당국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다. 금융소비자들의 투자 손실에 대한 조치가 대표적이다. 펀드 등에서 금융사고가 잇따르자 금융당국은 금융회사들에 강한 책임을 묻고 있다. 해외 금리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와 관련해서는 판매회사인 은행이 투자자에게 최고 80%를 배상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신뢰를 회복해야 금융이 산다는 명제 앞에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했다. 책임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볼 상황이 아니었다.
금융감독원은 라임펀드 사태의 책임도 모두 판매사에 있다고 봤다. 지난 6월 라임 펀드를 판매한 은행과 증권사 등에 ‘100% 배상 결정’을 내렸다.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판매사가 원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취지다. 조정안 수용 여부를 경영실태평가 등에 반영하는 방안까지 추진하기로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배상하는 것보다 더 큰 불이익을 주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명백히 잘못한 곳(운용사)이 있는데 돈 있는 곳(판매사)이 다 책임지는 것이 맞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금감원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금융사의 ‘희생’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한결같은 얘기다. 정부는 27일 상반기에 시행한 은행권 대출 만기 및 이자 유예 조치를 또다시 연장해주기로 했다. 은행권에서는 ‘부실을 미리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이자만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융당국의 ‘권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주주 배당을 자제하라고 권고했고, 오프라인 점포 정리 속도를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주주 가치 제고와 비용 감축, 리스크 관리 등 주식회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는데도 눈치를 봐야 한다.
코로나19 사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권에 대한 경영 간섭이 너무 심해져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는 목소리가 크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코로나 금융지원’ ‘한국판 뉴딜’ 등 정부 정책을 도와주느라 힘이 너무 든다”며 “금융사들이 리스크 관리 시기를 놓치고 경쟁력을 잃는다면 결국 피해는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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