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 의료보험시스템의 차이가 부른 결과다. 미국엔 노인(메디케어)과 저소득층(메디케이드)을 보조하는 공적보험이 있지만, 전 국민 대상 의료안전망은 사실상 부재한다. 반면 우리는 코로나 검사·치료비 80%(나머지 20%는 국가)를 건강보험에서 대준다. 1977년 제도 도입 후 44년간 착실히 축적해 왔기에 가능한 대처다. 사회안전망 투자는 이처럼 위기 때 진가를 발한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수많은 실직 가장들이 1995년 도입된 고용보험 덕에 최악의 위기를 버텨냈다.
서민 복지재원 일제히 바닥
‘포용’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 키워드도 ‘사회안전망 강화’다. 얼마전 8·15 경축사에서도 문 대통령은 ‘사회안전망 강화’를 두 차례나 언급했다. 놀라운 건 현실은 정반대라는 점이다. 5대 사회안전망인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장기요양보험은 일제히 고갈로 치닫고 있다.‘K방역의 주역’ 건강보험의 추락은 아찔하다. ‘문재인 케어’가 시작된 2018년부터 정확히 적자전환해 2년 연속 3조원대의 대규모 적자를 냈다. 올 1분기 적자만 9435억원으로 전년 동기(3946억원)의 2.4배다. 재원 대책 없이 ‘보장률 확대’ 등에만 과속한 결과다. ‘병원비 걱정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생색만 냈지 정부 지원은 오히려 줄었다. 건강보험 국고지원비율이 13.4%로 이명박(16.42%)·박근혜(15.35%) 정부보다 크게 낮아졌다.
국민연금 부실은 더 심각하다. 2040년 적자전환한 뒤 2054년 고갈이 예상된다. 2년 전 분석 때보다 적자전환은 2년, 고갈은 3년 빨라졌다. 이마저도 기금운용비 누락 등을 통해 300조원 넘게 부풀려진 결과라는 게 최근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정부는 하루가 급한 연금 개편 골든타임 2년을 허송하더니 ‘보험료 인상’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피해 중단 선언을 하고 말았다.
불과 3년 전 10조원대의 거금이 쌓여 있던 고용보험도 ‘연내 고갈’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다락같이 치솟은 최저임금으로 실업자가 속출한 데다 코로나가 겹쳐 월 지출이 1조원대로 급증한 탓이다. 정부가 ‘통계분식용’ 재정 일자리사업 예산을 고용보험기금에서 쌈짓돈 빼듯 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질병 노인에게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장기요양보험 역시 언제 펑크날지 모르는 살얼음판이다. 적립금이 0.8개월치에 불과해 말 그대로 그달 걷어 그달 지급하는 수준이다.
보험료 올려 버티기도 한계
정부 대책은 보험료 인상뿐이다. 건강보험료 인상률은 연 2.99%로 박근혜 정부(0.99%)의 세 배다. 그래도 안 되자 월급(소득)의 8%인 보험료율 상한 폐지를 검토 중이다. 장기요양보험료율도 최근 3년간 실질인상률이 73.6%에 달했지만 내년에 또 두 자릿수 인상이 예상된다. 고용보험료는 지난해 23%나 올랐음에도 바닥을 드러내자 3차 추경 때 3조1000억원의 빚(국채 발행)을 내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이런 땜질도 임계점에 왔다. ‘세수절벽’이 본격화돼 올 상반기에만 110조5000억원의 기록적인 재정적자가 났다. 국가부채 부담에 여권이 스스로 2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보류할 만큼 나라곳간은 비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국민 고용보험, 상병수당 도입 등 듣기 좋은 소리를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런 모순이 없다. 재원 대책은 안 들리니, 또 얼마나 더 사회안전망이 훼손될지 걱정이 앞선다. 약자들의 최후 보루인 사회안전망까지 정치로 물들일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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