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시대를 극복하겠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 바이든은 20일(현지시간) 후보 수락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며 정권 교체를 호소했다. 이날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체이스센터에서 한 화상 연설을 통해서다. 바이든은 24분가량의 연설에서 ‘트럼프’라는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트럼프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했다.
바이든은 둘째 아들 헌터와 딸 애슐리의 소개와 2015년 사망한 장남 보가 생전에 아버지를 소개하는 영상에 이어 연단에 등장해 “나는 어둠이 아니라 빛의 편이 되겠다”며 “우리가 하나로 뭉치면 이 암흑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은 맨 먼저 당파와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미국의 통합’을 역설했다. 그는 “나는 민주당 후보지만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나를 찍은 국민뿐 아니라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위해서도 똑같이 열심히 일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당파의 순간이 아니라 미국의 순간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분열을 조장하고 편가르기를 한다’고 한 비판의 연장선이다.
바이든은 “미국은 네 가지 역사적 위기가 동시에 닥치는 퍼펙트 스톰에 직면해 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대유행),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인종차별, 기후변화를 그 위기로 꼽았다.
바이든은 “500만 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17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50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고 1000만명 이상이 건강보험을 잃었다”며 “대통령은 미국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집권 첫날부터 국가 전략을 가동해 검사를 확대하는 한편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고, 의료장비를 개발하고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겠다고 했다.
이어 “일자리는 단순히 급여명세서가 아니라 존엄성과 공동체에서 당신의 위치에 관한 것”이라며 “내 경제 플랜의 모든 건 일자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제조업과 기술 분야에서 일자리 5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기후변화에 대해선 “단지 위기가 아니라 미국이 청정에너지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수백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할 기회”라고 강조했다.
투자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해선 ‘세금 구멍’을 제거하겠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1% 부자들과 거대 기업에 제공한 감세를 원상복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사회보장과 메디케어(노인 건강보험)를 지키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사회보장과 메디케어의 재원인 급여세를 인하하겠다고 한 것을 겨냥한 발언이다.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선 “동맹과 함께 서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안달하는 날은 끝났다”고 했다. 동맹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 ‘스트롱맨(권위주의 통치자)’과의 친분을 강조해온 ‘트럼프식 외교’를 정면 비판한 것이다.
바이든은 3년 전 버지니아주 샬롯스빌에서 백인 우월주의 단체와 반대 시위자들이 충돌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양쪽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며 양비론을 편 일을 거론하면서 “(그때) 대선에 출마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바이든은 “미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이라면서 모든 미국인이 기회와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며 연설을 마쳤다. 이후 부인 질 여사, 러닝메이트인 카멀라 해리스 부부와 함께 체이스센터 밖으로 나와 모여 있던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바이든은 이날 후보 수락연설 전까지 체이스센터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자택에 머물며 연설 준비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이날 낮에 찾아간 바이든 자택은 입구부터 경비가 삼엄했다. 기자가 다가서자 경비원들이 “여기는 사유지”라며 접근을 막았다.
바이든은 29세 때인 1972년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임기 6년)에 당선돼 내리 6선에 성공했다. 1988년과 2008년 대선 후보에 도전했지만 모두 중도 하차했다.2008년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상원의원 당선 후 48년 만에, 대권 도전 삼수 끝에 바이든은 대통령 꿈에 다가섰다.
윌밍턴·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