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오만과 독선, 원리주의로 흐르는 행태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집권 3년이 지났음에도 야당과 대화·타협을 통해 꼬인 국정을 풀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국회 상정 이틀만에 시행' 기록을 쓴 최근의 '임대차 3법' 개정이 그렇고, '부동산 세제 3법' 밀어붙이기 역시 마찬가지다. 법안 통과 지연에 따른 세입자 피해와 시장 불안을 줄이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설명은 그 과정에서 의회민주주의 가치를 발로 차버렸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이미 위헌 판결이 내려진 '수도 이전'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한다는 것도 헌법재판소 등 사법체계를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경직적인 주 52시간제 적용, 공기업 비정규직의 무리한 정규직화 등 소득주도성장의 문제점이 수없이 불거지는데도 이 정부의 이념 지향엔 흔들림이 없다. 집념이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다. 탄소배출 저감과 상충하는 탈원전 정책도 변함 없으며, 국가채무비율의 급상승에도 '예산 퍼붓기'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코로나 위기로 쪼그라든 세입 벌충을 위한 사실상의 '부자증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을 통한 검찰권 힘빼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일제 위안부 및 징용 피해자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미국과의 동맹 약화에 대해서도 수많은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시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금의 집권세력은 왜 이토록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통치방식을 고집하는 걸까. 합리적인 비판과 대안 제시라 여겨지는 부분에도 귀를 꼭꼭 틀어막는 이유가 뭘까. 쉽게 이해될 것 같지 않지만, 그 뿌리를 찾아들어가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운동권 특유의 세계관과 가치지향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과도한 집착
한국 사회 진보운동은 20세기 들어 싹트기 시작했지만 6·25 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그 전통이 끊어졌다. 반공을 넘어 멸공(滅共)이 국시(國是)가 됐던 시절, 반공 없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통치논리에 밀린 때문이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저임금 노동자들, 민주적 통제가 아닌 군사정부의 폭정, 군사·외교부문에서 자주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인식 등이 겹치며 1980년대 들어 사회변혁운동의 지향점에 대한 과학적 성찰 노력이 본격화됐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집착이 특히 강했다. 지금 정권의 핵심인 당·정의 수뇌부가 이런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좌파 특유의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방법론'은 한국 사회의 복잡다단한 사회적·역사적 모순 속에서 의미 없는 것은 빼버리고 골간만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길러졌다. 유물론, 유물사관, 변증법 등이 주요 도구였다. 이를 통해 어떤 사회로 발전시켜갈지 목표지향적이고 목적주의적인 세계관을 뿌리깊게 갖게 됐다. 자신들의 과학적 분석과 결과가 틀렸다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나는 항상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당시 운동권이 다 그랬다.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정세 분석 없이는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해도(海圖) 없이 항해에 나선 배가 표류하는 것과 같다. 요즘 하는 말로 엄청난 '멘붕'(멘탈붕괴)을 겪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사법개혁'이든, 노동자권익 보호든, 한반도평화 문제든, 일본과의 역사갈등이든, 한·미동맹 문제나 중국과의 외교든 각기 사안별로 합리적 선택과 이해관계자 갈등 조정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아예 못한다. 이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지향점과 목표, 타깃이 있어야 한다. 이런 강박이 좌파 운동권의 고유한 습성이다.
과거 소주성을 놓고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이념에 치우친 어설픈 가설이란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 정부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그 핵심 원인을 불평등 구조의 지속, 양극화 심화라 보고 이를 획기적으로 바꿀 이론을 만들고 현실에 끼워맞춘다. 이것을 '과학'이라 생각하는 때문인지, 이념에 치우쳤다는 비판은 그들에게 잘 들리지도 않는다.
◆'수정주의'에 대한 거부감
다음으로 '수정주의' '경제주의' '조합주의'로 일컬어지는 적당한 타협을 극도로 싫어한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이 먼저 일어났는데도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에서 완성됐고 서유럽은 오히려 쇠퇴한 것을 두고 그들은 수정주의에서 원인을 찾는다. 서유럽 사회주의운동이 복지국가 등과의 경쟁에서 선명성을 잃고 노동운동이 경제투쟁 중심으로 이어진 반면, 러시아에선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의 대중추수주의를 비판하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해 결국 10월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인식이다.좌파 운동권 출신들은 이런 역사를 반추하며 자신들의 지향점을 수정주의가 아닌 원칙주의, 비타협주의에 맞췄다. 젊은 시절 생각들이 여러 사회적 경험과 경제활동 속에서 수정될 수 있지만, 지금의 정권 핵심층은 '데모가 직업' 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흔히 하는 말로 월급을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고, 누군가에게 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리 없다. 운동권 그룹의 이런 동질성은 협상과 양보, 타협이라는 민주적 정책결정의 기본원리에 더더욱 다가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그렇게 배격하고 싫어했던 대중추수주의가 바로 포퓰리즘이다. 19~20세기에는 포퓰리즘이 좌파운동의 목표를 흐릴 수 있었지만, 좌파들도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치권력 획득에 올인하는 현대에는 포퓰리즘이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이런 점에선 포퓰리즘의 재발견이라 볼만 하다. 좌파들은 기본소득 도입으로 사회 안정이 가능하다는 우파들만 경계하면 포퓰리즘으로 이른바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과학과 원칙주의 지향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공지능(AI)의 미래를 얘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시작됐고, 경제적 계층 갈등 못지 않게 젠더문제와 권위적 문화구조 속 억압의 문제가 큰 사회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념 지향의 정치가 모든 이들의 삶 주변 정치로 그 중심이 바뀌어가고 있다. 20세기 수준의 운동권 사고 틀로는 이런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고 대응하기 어렵다. 변화의 시동이 지금 정부의 내부에서 걸리지 않을 테고, 이런 정치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