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임직원의 상반기 업무 성과에 점수를 매기는 ‘인사평가’ 시즌이다. 고과를 잘 받고 싶은 김과장 이대리들은 이 무렵이 되면 평판에 더 신경 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건 기본이다. 가욋일을 자발적으로 맡기도 하고, 기회가 생기면 자신의 실적을 상사에게 어필한다.
평가자인 김상무 이부장들은 그런 부하 직원을 보며 남몰래 속앓이를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던가. 마음 같아선 직원들에게 좋은 점수만 주고 싶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줄을 세워 누군가에게는 낮은 등급을 줄 수밖에 없다. 막상 자신도 상사와 후배로부터 상·하향식 인사평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 하지만 평가 뒤 불만을 얘기할 직원과 서먹해질 분위기를 챙겨야 하는 것도 ‘낀 세대’인 김상무 이부장들의 몫이다. 취업 사이트 사람인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약 37.1%는 반기마다, 17%는 분기마다, 10.6%는 매달 인사평가를 하고 있다.
평가 기준 미리 밝히고 수시로 메모
미리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일은 요즘 김상무 이부장들이 가장 중시하는 ‘원칙’이다. 그래야 직원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다. 중견 제조업체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최 상무는 올초 직원들에게 “인사평가는 실적만 보고 하겠다”고 선언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얘기를 강조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연말 인사평가에서 난감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최 상무는 당시 성과가 객관적으로 높지 않아도 전년 대비 많이 개선된 직원에게 좋은 등급을 줬다. 성과를 크게 높인 개인의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만을 품은 몇몇 직원이 인사 부서에 재평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최 상무는 “정량 평가에 나름대로 판단한 정성적인 측면을 반영했는데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뒤탈을 없애기 위해 올해는 철저하게 실적 중심으로 평가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적보다 평소 일하는 태도와 자세가 평가에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서울의 한 건설회사에서 일하는 김 상무의 평가 기준은 실적보다 태도다. “수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아닌 이상 직원들의 능력에 큰 차이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상무는 “평직원의 실적은 당시 거래처 상황 등 외부 환경에 좌우될 때도 많다”며 “숫자보다 직원의 태도를 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정확한 평가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불만 제로’를 위해 귀찮아도 수시로 평가해두는 상사도 있다. ‘데이터 축적형’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박 팀장은 수시로 ‘미니 인사평가’를 한다. 팀원들의 두드러진 성과나 실책을 잊지 않고 적어둔다. 남들은 냉정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도 없이 반기 말 직원을 평가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기록해야 직원들이 이의를 제기해도 평가 결과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게 박 팀장의 설명이다.
승진 대상자 ‘눈치’도 봐야
‘냉정하게 하자’고 다짐하지만 평가 기준이 뒷전으로 밀릴 때도 있다. 일부 직원에게는 인사평가 결과가 승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인사평가가 대부분 상대평가인 만큼 승진 대상자를 배려하다 보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오 팀장이 요즘 많은 생각을 하는 이유다. 현재 그의 팀에 승진 대상인 과장은 여섯 명이다. 그러나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 상반기 평가는 누가 승진할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오 팀장은 “나이, 연차, 실적 중 무엇을 고려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며 “인사 적체로 승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 만큼 ‘고참’들 사정도 봐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한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박 부장은 올해 일 좀 한다는 사람들을 데려와 ‘드림팀’을 꾸렸다. 부서 상반기 실적도 만족스럽다. 평가 시즌을 앞두고는 고민에 휩싸였다. 사내 규정상 한 명에게는 최하점인 D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박 부장은 “며칠을 고심했지만 막내 직원 중 한 명에게 D를 주는 것 말고 방법이 없더라”며 “승진 대상자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낮은 점수는 앞으로 성과를 낼 가능성이 큰 사람을 찾다 보니 결국 막내였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유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김 부장은 요즘 막내 직원을 볼 낯이 없다.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성실한 태도로 일을 한 막내에게 최고 등급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부서에서 진급 심사가 얼마 남지 않은 고참 직원이 눈에 밟혔다. 고심 끝에 고참에게 ‘S’ 등급을 줬다. ‘B’ 등급을 받은 막내 직원에게는 따로 밥을 사주고 다독였다. 김 부장은 “고참 직원이 승진하지 못하면 평생 원수로 남을 것 같았다”며 “승진 못한 탓을 상사에게 돌릴 텐데 그 부담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토로했다.
인사 앞두고 ‘아싸’되는 김상무·이부장
고민을 거듭해 평가하고 나면 ‘후폭풍’을 걱정할 차례다. 요즘 젊은 직원들은 고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김상무 이부장들은 부하 직원을 납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미리 설명하고, ‘친분으로 인사고과를 줬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행동도 조심한다.금융회사에 다니는 김 본부장은 인사평가를 앞두고 자발적 ‘아싸(아웃사이더)’가 된다. 직원들과의 술자리는 물론 식사도 자제한다. 그는 “고과를 높게 줄 직원은 사람들이 수군댈까 봐, 고과를 낮게 주려고 마음먹은 직원은 미안해서 피하게 된다”며 “나도 사람인지라 고과를 받고 기가 죽은 후배들을 보는 게 괴롭다”고 푸념했다.
미리 소통하는 경우도 있다.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양 부장은 인사평가 시즌이 되면 팀원들에게 미리 전화를 돌린다. ‘A’ 등급을 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양 팀장은 “팀원들도 상대평가에서 모두 A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직접 연락해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건 또 다른 얘기”라며 “‘이번엔 이해해 달라’고 말할 때는 내 자신이 ‘을’이 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