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적기의 규범을 세운 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면서부터다. 이어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마련돼 정서법의 골격이 갖춰졌다. 표준어와 함께 동전의 앞뒤라 할 수 있는 표준발음법은 그뒤로도 50여 년이 더 지난 1988년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발음의 기준을 세운다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원칙 [순니익], 현실발음 [수니익]…둘 다 허용
서울의 지명에서 아주 멋들어진 이름 가운데 하나가 ‘학여울’이다. 이 말은 ‘학(鶴)’과 고유어 ‘여울’의 합성어다. 여울이란 강 같은 데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말한다.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곳에 1993년 서울지하철 3호선 학여울역(강남구 대치동)이 들어섰다.그런데 이 ‘학여울’의 발음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항녀울]이라 하는가 하면 훨씬 많은 이들은 [하겨울]이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항녀울]이 맞는 발음이다. 실제로 역 구내에는 로마자로 ‘Hangnyeoul’이라 표기돼 있다. 만약 [하겨울]로 발음한다면 그 표기는 ‘Hagyeoul’이 됐을 것이다.
‘학여울역’의 발음은 어떻게 [항녀울력]으로 됐을까? 우선 ‘학+여울’의 결합부터 보자. 발음할 때 ㄴ음이 첨가돼 [학녀울]로 바뀐다(표준발음법 29항). ‘막일, 늑막염, 내복약, 솜이불’ 같은 합성어를 소리 내 보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일관되게 ㄴ음이 첨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항녀울]로 바뀌는데, 이는 자음동화(정확히는 비음화) 때문이다. 첨가된 ㄴ음으로 인해 앞말의 받침 ㄱ까지 비음(콧소리 ㄴ, ㅁ, ㅇ)으로 바뀐다(표준발음법 18항). ‘먹는[멍는], 국물[궁물], 옷맵시[온맵씨] 꽃망울[꼰망울] 밥물[밤물]’ 같은 게 그런 예다.
이제 [항녀울]에 ‘역’을 붙이면 발음이 완성된다. [항녀울]과 ‘역’의 결합에서는 마찬가지로 ㄴ음 첨가현상이 나타난다([항녀울녁]). 이어서 최종적으로 [항녀울력]으로 바뀌는데, 이는 유음화 현상(넓게는 자음동화)이다.(표준발음법 20항: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ㄴ은 ㄹ로 발음한다.) ‘서울역[서울력] 휘발유[휘발류] 물약[물략] 설익다[설릭따] 솔잎[솔립]’ 같은 게 그 예다. 모두 ㄴ이 먼저 첨가된 뒤 앞에 있는 받침 ㄹ에 의해 동화가 일어난다.
ㄴ음 첨가 없이 연음해 발음하는 현상 강해
그런데 ㄴ음 첨가현상은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순이익, 연이율, 밤이슬, 감언이설.’ 2017년 4월 국립국어원은 이들의 발음 처리를 두고 고심에 빠졌다. 그만큼 국민들 사이에 이 발음에 관한 궁금증이 많았다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순이익’을 보면, 표준발음법은 이 말을 [순니익]으로 발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앞서 살핀 ㄴ음 첨가현상이다. 하지만 언어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받침을 흘려내린 [수니익]으로 발음한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은 이 발음도 인정했다. 나머지 단어도 [연니율/여니율, 밤니슬/바미슬, 가먼니설/가머니설]로 복수발음을 허용했다.이런 흐름은 문법은 현실언어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다. 다만 단어마다 ㄴ음 첨가 또는 연음의 허용 여부가 다르기 때문에 일일이 발음을 알아둬야 한다. 발음은 표기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서법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국제화 시대에 따라 우리 지명과 인명을 영문자로 표기하는 일이 잦다. 우리말의 세계화 작업도 시급한 과제다. 4대 어문규범 중 하나인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