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비서에게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이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권의 태도도 논란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과거 정치권에선 자당 소속 정치인의 성범죄 의혹이 불거지면 진위가 명확히 규명되기 이전이라도 사과하거나 최소한 유감 표명을 하는 게 통상적이었다. 진상 규명될 때까지 당원권을 정지시키거나 탈당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청와대와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더불어민주당은 '피해 호소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박원순 전 시장을 감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비교해도 확연히 달라진 대응이다. 도대체 왜 민주당은 이토록 박원순 전 시장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일까?
표면적 이유는 일단 박원순 전 시장 사망으로 진상 규명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허윤정 민주당 대변인은 박원순 전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된 지난 10일, 민주당이 피해자에 대한 입장을 내지 않는 데 대해 "보도되고 있진 않지만 다른 쪽에선 전혀 다른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었다. 당시 언급한 '전혀 다른 얘기'가 무엇인지 직접 물어봤지만 허윤정 대변인은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허윤정 대변인은 이어 "(입장 발표를) 회피하거나 미루는 게 아니다. 실제로 정확히 내용에 근거해서 대응하겠다"면서 "죽음은 있었지만 죽음의 실체가 파악이 안 된 것이다. 저희로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입장을 내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민주당이 박원순 전 시장을 감싸는 것은 정치적 이유가 더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성철 소장은 "여성·인권 등은 민주당이 오랫동안 선점해온 이슈다. 안희정 전 지사, 오거돈 전 시장에 이어 박원순 전 시장까지 성범죄 가해 사실을 인정하면 도덕적 우위가 일거에 무너진다는 불안감을 느꼈을 수 있다"며 "고인의 명예가 지켜져야 우리(민주당)도 산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한 것 같다. 도덕적 우위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박원순 전 시장과의 '끈끈한 관계'도 또 다른 이유로 거론됐다. 장성철 소장은 "박원순 전 시장은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등에 참여한 진보 진영의 거물이다. 이해찬 대표도 박원순과 '40년 동지'라고 말하지 않았나"라면서 "민주당에 박원순 전 시장과 인연이 없는 인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인간적인 이유 등으로 여권이 감싸기에 나선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민주당이 '민심을 읽는 안테나'가 고장난 것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안희정, 오거돈 뿐 아니라 조국, 윤미향 등 여권 인사 관련 의혹이 연이어 불거졌지만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꾸준히 50% 이상을 유지해왔다. 때문에 박원순을 감싸더라도 '국민은 우리를 지지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 원장도 "도미노 현상으로 인한 여권의 몰락을 우려해 박원순을 감쌌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진 원장은 "안희정, 오거돈에 이어 벌써 세 번째 광역단체장의 성범죄다. 이것마저 인정하면 여권 몰락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며 "게다가 박원순 전 시장이 숨져 진상 규명이 어려워진 만큼 여권이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결과적으로 '전략 미스'라 본다"고 평했다.
다만 민주당이 최근 뒤늦게 '사과 모드'로 전환한 것은 전략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봤다. 민주당은 지난 17일 박원순 전 시장 고소인을 '피해 호소인'이 아닌 '피해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도 "민주당이 박원순 전 시장 사망을 이유로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며 "여기서 밀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최소한 '판정 불가'로 끌고 가려 했던 것 같은데 결국 역풍만 맞았다. 민주당이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민주당이 언론과 피해자가 성추행 관련 의혹을 추가 제기하기 어렵게끔 박원순 전 시장 추모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원순 전 시장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진성준 민주당 의원은 고인에 대한 일방적 의혹 제기가 '사자명예훼손'에 해당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해찬 대표도 박원순 전 시장 빈소를 찾아 조문한 직후 "고인에 대한 의혹이 있는데 당 차원 대응이 있을 예정인가"라는 취재진 질문이 나오자 "그건 예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했고, 질의가 이어지자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하는 것인가. 최소한 가릴 게 있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 전직 민주당 당직자는 "민심을 읽는 안테나가 고장났다는 지적이 특히 공감된다"고 전했다.
그는 "금태섭 전 의원 등이 당내에서 소신 발언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박원순 전 시장을 비판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지지층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끼게 되고, 반대로 지지층을 의식한 강성 발언만 힘을 얻는 구조"라면서 "그러니 외부에서 볼 땐 민주당 전체가 박원순 전 시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친다. 실제로는 당내에도 박원순 전 시장을 감싸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했다.
이어 "아직 박원순 전 시장을 가해자로 단정지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면 진상 규명될 때까지 당은 중립적 자세를 취해야 했다. 전국에 현수막을 내걸고 추모 분위기 조성에 나섰지 않나"라며 "이번 사태를 겪으니 정말 걱정된다. 우리 당이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돼 중도층과 동떨어진 정당이 될까봐 우려된다"고 털어놨다.
[TMI는 '너무 과한 정보(Too Much Information)'의 준말입니다. 꼭 알지 않아도 되는 정보지만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정치 뒷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김명일 한경닷컴 기자 mi73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