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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70대 이병철과 20대 잡스 만남…"모바일 시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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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1월, 28세의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도착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애플이 아이패드를 출시하기 27년 전이었지만 잡스는 그때부터 태블릿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를 만난 뒤 이병철 회장을 찾아왔다.

당시 70대였던 이병철 회장은 잡스를 직접 맞이했다. 그는 미국에서 온 버릇없고 성마르고 수다스러운 젊은이를 전혀 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고급 의자들과 한국식 전통 비품이 구비된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잡스에게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의 컴퓨터칩 공급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 회장은 잡스가 떠난 뒤 비서들에게 단언했다. “잡스는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삼성이 없었다면 애플의 아이폰도 없었을 테고, 잡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삼성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제프리 케인이 저서 《삼성 라이징》에서 소개한 에피소드다. 저자는 2009년부터 5년간 서울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다. 2010년 취재차 삼성 수원캠퍼스에 처음 방문한 후 10년간 ‘삼성 연구’를 위해 전·현직 삼성 직원과 경영진, 정치인, 사업가, 국회의원, 언론인, 사회운동가, 분석가 등 400여 명을 만났다.

이 책은 논문의 성격이 짙다. 지금까지 삼성에 관한 국내외 책들과 달리 문체가 딱딱하고 건조한 편이다. 삼성에 대한 찬양 또는 비판 일변도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자극적인 표현도 동원하지 않는다. 40년 전 설탕과 종이, 비료를 생산하는 개발도상국의 작은 기업에서 애플과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를 양분하는 ‘제국의 거인’으로 성장한 삼성의 기업 스토리에 구태여 거창한 형용사 또는 부사가 필요없다고 판단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 책을 쓴 이유는 신흥 강국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스토리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시각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는 삼성의 극적인 성장 배경에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한국인의 정신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고 설명한다. “삼성은 자신보다 훌륭한 존재, 자신보다 큰 존재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해했다”며 “삼성은 한국인들에게 미래의 영광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파격적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문장으로 상징되는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도 비중 있게 전달한다. 저자는 “기술 세계에서 조롱의 대상이었던 삼성은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전 세계 모든 유형의 고급 전자기기들뿐만 아니라 그 부품들의 설계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이젠 서양인 중 누구도 삼성을 ‘삼석(Sam-suck, suck은 ‘수준 이하’ 또는 ‘후지다’는 의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삼성의 조직문화에 대해선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적한다. 저자는 삼성의 수직적인 시스템이 업무처리의 효율성을 높이고, 모든 임직원에게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를 공유할 수 있게 했다고 강조한다. 다만 21세기에 걸맞은 수평적 문화 도입, 총수 일가와 관련된 국민의 양면적 감정 해결의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삼성 일가를 둘러싼 각종 사건과 의혹에 대해선 “전 세계에서 그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둔 기업이 그처럼 가족 통솔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 “왕가의 분쟁과 궁정의 음모 같은 봉건적 전통의 재현이라는 스토리의 또 다른 면을 봤고, 그 부분에서 삼성에 매력을 느꼈다”고 덧붙인다.

그는 “외부인들이 한국 대기업에 대해 연구하면서 배울 수 있는 큰 교훈은 거대한 규모를 갖춰 급변하는 추세와 시장의 불안과 무역 전쟁에서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성을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이라고 강조한다. 또 “맨손으로 시작해 날마다 더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하며 성을 쌓아왔던 금욕적인 세대의 스토리”라고 요약한다.

이 책의 백미는 맨 끝에 실린 참고 자료 목록이다. 한국어판 기준으로 40여 장에 달한다. 저자는 “익명을 요구한 사람들이 말한 내용은 특히 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인터뷰와 비교하고, 가능한 경우에는 문서화된 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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