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가 홍콩달러 페그(연동)제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홍콩달러 환율을 달러당 7.8홍콩달러 안팎으로 고정시키는 페그제가 불안정해지면 국제 금융허브로서의 홍콩의 위상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페그제 폐지는 중국 정부의 ‘홍콩 국가보안법’ 강행에 대응하는 미국의 카드 중 하나로 거론돼왔다.
외환시장 대혼란 전망
블룸버그통신은 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고위 보좌진 일부가 홍콩보안법 시행에 대한 징벌로 홍콩달러의 달러 페그제에 타격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단으로는 홍콩 은행들의 달러 매입에 한도를 두거나 미국 은행의 홍콩달러 보유량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홍콩에는 중앙은행이 없으며 금융관리국(HKMA)이 감독 기능과 함께 통화정책 결정 등의 중앙은행 역할도 한다. 홍콩달러는 HSBC, 중국은행, 스탠다드차타드 등 시중은행이 발권한다. 이 은행들이 홍콩달러를 발행하려면 발행 규모에 상응하는 달러를 HKMA에 내야 한다. 미국이 이 은행들의 달러 구매량을 제한하면 발권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페그제 자체도 흔들릴 수 있다. 외환시장에서 달러와 홍콩달러의 유통량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페그제를 유지하는 핵심 조건이기 때문이다.
백악관에선 미국이 홍콩에 부여하고 있는 무역·투자·관세·비자 등에서의 다양한 특별지위를 박탈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페그제의 바탕이 되는 양국 통화의 자유로운 환전 보장도 특별지위 중 하나다.
홍콩은 1983년 1월부터 환율을 달러당 7.75~7.85홍콩달러로 유지하는 페그제를 시행해왔다. 페그제를 기반으로 해외 기업들은 언제든 환손실 위험을 지지 않고 홍콩달러와 달러를 환전해왔다. 해외 기업과 투자자들이 홍콩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는 큰 원동력이 됐다.
페그제가 무너지면 기업과 은행들이 쌓아놨던 홍콩달러를 방출하면서 외환시장에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홍콩으로의 자본 유입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다. BBVA은행 홍콩지점의 시아러 이코노미스트는 “홍콩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에도 악재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수 있는 위험한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페그제 무력화 방안은 홍콩보안법을 지지한 은행들을 제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는 지난달 홍콩보안법 공개 지지 성명을 내놨다.
미-홍콩 범죄인 송환도 중단 가능성
홍콩 정부는 페그제가 미국의 허가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며, 독자적으로도 페그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폴 찬 홍콩 재무장관은 “5월 말 외환보유액은 4424억달러(약 528조원)로 페그제를 방어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민은행과의 통화 스와프를 통해 3조달러가 넘는 중국의 외환보유액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페그제가 무너지면 중국보다 홍콩 은행과 미국 기업들이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딩솽 스탠다드차타드 아시아담당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페그제 무력화 같은 극단적 조치까지 취하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이 검토하는 또 다른 금융 관련 제재로는 미국 은행과 홍콩·중국 은행의 달러 거래 규모를 제한하는 방안, 세계 은행들이 달러 거래를 결제할 때 쓰는 네트워크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홍콩을 배제하는 방안 등이 꼽힌다. 금융 외 조치로는 상호 범죄인 송환 조약 폐지, 홍콩 경찰과의 협조 중단 등도 고려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 페그제
pegged exchange rate. 자국 통화의 환율을 기축통화인 달러 등에 고정시키는 환율 제도. 페그(peg)는 못이나 말뚝을 뜻한다. 페그제를 시행하면 환율 불확실성이 사라져 교역과 자본 이동이 활성화된다. 이를 유지하려면 정부가 시장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며, 관리에 실패하면 외환시장이 요동칠 수 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