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출신으로 3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박모씨(27)는 최근 정보기술(IT) 자격증 수강을 신청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기업들이 언택트(비대면)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선호한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박씨는 “하다하다 IT 자격증까지 따려니 수강비 부담이 크다”며 “취업을 위한 스펙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채용문이 좁아지면서 대학가와 취업준비생 사이에선 스펙쌓기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 취업 필수항목으로 꼽히던 ‘취업 3종 세트’(학벌, 학점, 토익점수)는 10년 전 얘기다. 취업시장에선 “학벌, 학점, 토익점수, 어학연수,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수상 경력 등 ‘취업 8종 세트’는 기본”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엔 IT 관련 자격증이 부각되고 있다. 주요 취업포털엔 “취업에 꼭 필요한 IT 자격증을 따라”는 내용의 광고가 많다.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1·2급,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정보처리기능사 등 4~5종을 패키지로 묶은 강의가 유행이다.
임민욱 사람인 플랫폼사업본부 팀장은 “취업에 자신감을 잃은 취업준비생들이 이른바 ‘취업 n종 세트’에 더 매달린다”며 “취업 준비에 드는 비용이 과도하게 늘어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해 11월 구직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인당 평균 취업준비 비용은 연간 348만원에 달했다. 2008년 같은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175만원·구직자 1194명 응답)의 두 배다.
스펙 경쟁에 지친 취업준비생이 많아지면서 공무원 시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공무원 시험에선 스펙을 크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13일 치러지는 8·9급 공무원 시험에는 24만 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10.36 대 1에 이른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난 실패한 호모스펙타쿠스"…취준생 80% '公試 동아줄' 매달려취업준비생 김영진 씨(26)는 자신을 ‘실패한 호모스펙타쿠스’라고 얘기한다. 호모스펙타쿠스는 취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끊임없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이들을 부르는 조어다. 김씨는 대학교 입학 후 매년 2개 이상의 스펙을 만들었다. 학기 중에도 틈틈이 학원에 다니며 토익스피킹, 오픽 시험을 준비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달 ‘공시족(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에 합류했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이후 채용시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어서다. 김씨는 “이 정도 스펙이면 되겠지 싶다가도 시험에 떨어지면 자신감을 잃는다”며 “기업 채용공고를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기업채용 줄어들고 ‘공취생’ 급증취업상담 전문가들은 앞으로 공무원 시험 희망자가 더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코로나19로 민간 채용시장의 문이 더 좁아진 데 따른 변화다. 상당수 기업이 채용 일정을 미루거나 규모를 줄였다. 변지성 잡코리아 팀장은 “취업시장이 침체돼 기업 입사를 희망하던 취업준비생의 마음은 급해질 수밖에 없다”며 “매년 일정 인원을 고정적으로 선발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 취업을 희망하면서 공무원 시험까지 동시에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을 뜻하는 ‘공취생’이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대학생 오모씨(25)는 “‘취업절벽’에서 기댈 수 있는 건 공무원 시험뿐”이라며 “그렇다고 공무원 시험만 준비하는 것은 불안해 기업 취업준비도 병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달 대학생 및 취업준비생 2013명을 대상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36.0%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의 응답(24.7%)보다 11.3%포인트 증가했다. ‘앞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49.1%에 달했다.
실제 올해 공무원 시험 응시 규모는 작년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국방부 및 육·해·공군에서 올해 일반군무원 4139명을 채용하는 데 총 6만7792명이 몰렸다. 평균 경쟁률은 16.4 대 1이다. 지난해 4만112명이 응시해 10 대 1의 평균 경쟁률을 기록한 것보다 높다. 특히 행정9급(공개경쟁채용)은 481명 모집에 2만4669명이 응시했다. 평균 경쟁률이 51 대 1에 달한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을 위해 응시해야 하는 법학적성시험(LEET)의 지원자 수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1학년도 법학적성시험 응시자는 1만2244명으로 지난해(2020학년도)보다 9.7% 증가했다. 전국 25개 대학 로스쿨의 입학정원(2000여 명)의 여섯 배가 넘는 수준이다. 공무원, 공기업, 로스쿨 시험 등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코로나19로 ‘언택트(비대면)’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굳이 인력을 충원해야 하느냐는 기업이 많아지는 것도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적성 고려는 뒷전취업준비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토로도 잇따르고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달 구직자 21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81.9%가 ‘경제력이 성공적인 취업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복수응답)로는 ‘취업준비에 집중할 수 있어서’(57.7%), ‘더 좋은 교육과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48.3%), ‘스펙을 쌓기 위해선 돈이 필요해서’(46.2%) 등이 꼽혔다. 또 전체 응답자 중 83.3%가 취업준비 때 경제적인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온라인교육업체 관계자는 “자격증은 자기계발이나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해 딸 때 그 가치가 크다”며 “취업 스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일단 해보고’ 식의 공취생이 늘어나는 데 대한 우려도 크다. 취업준비생이 가치관이나 적성 등을 따지기보다 일단 취업 자리를 얻고 보려는 것은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코로나 불황’에도 취업자가 업무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새 일자리를 알아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