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공자는 공동체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인격은 무엇인가를 논한다. 손자는 국가 공동체의 불태함을 위해 임금과 장수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자병법의 오기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지켜야 할 만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고전들은 이렇게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장자와 노자, 도가 쪽 고전들도 어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둑질에도 도(道)가 있습니까.” 도척이 대답하길 “물론이다. 어디든 도 없는 곳이 있겠느냐.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는 게 성(聖)이다. 털러 들어갈 때 앞장서는 것이 용(勇)이다. 나올 때 맨 나중에 나오는 게 의(義)다. 도둑질이 성공할지 안 될지 아는 게 지(知)다. 훔친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게 인(仁)이다.”
장자 ‘거협편’에 나오는 장면이다. 춘추 말기 노(魯)나라 출신의 유명한 도적패 두령 도척이 인과 의, 성과 인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는데 도덕과 정의, 명분을 보는 도가의 시선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장이다. 노자와 장자는 도덕과 정의, 윤리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견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왜냐하면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순수한 본의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욕과 이익 때문에 도덕과 윤리의 깃발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가 정작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는커녕 불선하고 추하게 만들고 악순환의 작용을 일으킬 여지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가 고전은 과연 윤리와 도덕은 무엇인지, 우리가 윤리와 도덕을 외칠 때 어떤 자세를 갖고 자신을 성찰해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 정의를 말한다. 누군가 도덕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의심해봐야 한다. 저 사람 혹시 권력욕 때문에, 자신의 이익과 돈 또는 명예 때문에 저런 주장을 하고 운동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리고 그런 의심은 자신에게도 향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정의를 말하고 도덕을 말할 때 혹시 나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주목받고 사회적 자원과 상징 자산이란 한정된 재화를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위대한 대도가 사라지니 인의(仁義) 따위가 생겼고,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겼다. 육친이 화목하지 못하니 효도와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면 충신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노자 도덕경 18장)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등장한다. 지혜가 등장하자 거짓말이 횡행한다. 가정에 불화가 심하니 효도하자, 자애하자는 말이 높아지고 국가가 혼란해지니 충신이랍네 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아니 애초에 효자가 있기에 가정이 불화하고, 충신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조정이 혼란스러운 거다. 노자의 생각이 그러한데 여기서 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춰 질문해보고 싶다. 한국에 수많은 시민단체가 정말 아름다운 목적과 대의를 위해 조직됐고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순수한 목적과 본심으로 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정말 순수한 선의와 명분을 위해 움직인다지만 행여 그 선의와 명분이 반대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을까.
정의기억연대 사태를 보면 회계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외려 문제는 그들이 인권을 말했고, 인권단체로서 활동했다지만 반대로 반(反)인권단체 내지 반인권적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여성 인권이 아니라 반일 민족주의라는 협애한 틀에 운동을 가두고, 그래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방해하고, 좌판 행상처럼 할머니들을 전시해놓으며 다니고, 피해 당사자들의 주체성을 소거하고…. 이건 반인권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의연, 정대협만이 아니다. 다른 시민단체들은 사정이 어떠한가. 대의와 명분은 깃발일 뿐이고 국가 세금에 기생하면서 ‘현대판 서원’ 행세를 하는 조직은 없는가.
이런 질문들 던지고 싶은데 도가의 고전들은 역설한다. 정의와 도덕, 명분을 어떤 자들이 소리 높여 말하고, 왜 그렇게 깃발을 들어대고, 그런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세상에 주는지 따져보고 의심해봐야 한다고. 정말이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의식을 던져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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