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소비를 부추기는 대중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개별화됐다. 대도시 속에서 크게 축소된 개인은 익명의 공간 속에 안주하는 존재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전후로 젊은이의 취업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자립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생활 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것이라고 ‘혼밥’ ‘혼술’ ‘혼행’이라 하고, 혼자 이끄는 경제라고 ‘1코노미’라 하며, 혼자인 삶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얼로너(aloner)’라고 말한다. 과밀한 도시 속에서 겨우 얻은 협소한 자기 공간은 혼자 머무는 공간이니 ‘혼공(空)’이라 할 만한데, 이 혼공이야말로 타자와 거리를 두고 고립의 자유를 즐기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그 ‘혼자’는 겉보기에는 폐쇄와 고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에 있는 수많은 시설에 의존함으로써만 가능한 고립이다
그렇다고 도시를 살아가는 그 ‘혼자’는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도 혼자 이동하며, 영화를 볼 때나 숙박할 때도 교통비와 음식값으로도 모두 1인당 요금을 내지 않는가? ‘혼자’들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어디와 어디 사이를 이동하며 역, 호텔, 공항, 몰 등 이동을 위한 공간의 서비스를 받는다. 원룸처럼 소유하지 않고 혼자 점유하고, 카페 한구석처럼 반쯤 점유하다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도시의 소비 공간을 익명적으로 즐길 수 있다고 여겼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그야말로 크게 감소했다. 심지어는 사람이 많이 모이고 이동하는 시설은 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야 할 기피 장소가 돼 버렸다. 혼자 따로 떨어져서 익명적으로 사는 ‘혼공’의 생활이 이제는 정말로 격리된 ‘혼공’이 되고 말았다. ‘혼밥’ ‘혼술’이야 ‘얼로너’인 내 의지로 타자와 거리를 두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거리에서 스치는 타인도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정도로 이들은 의존하고 있던 도시의 다른 시설과 단절되고 말았다.
건축이 이 땅에 서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기 위함이고, 공동체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생각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어느덧 함께 있어 다른 사람의 미묘한 감정까지 읽을 수 있던 공간은 사라져 버리고, 온라인상으로 같은 시간만 공유할 수 있음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가까이 있는데도 실제로는 분리돼 있고, 물리적으로는 단절돼 있는데 전자적으로만 접속할 수 있는 정보 공간이 건축 공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게 됐다. 건축의 근본적인 가치는 이렇게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코로나19 이후에는 대도시는 지방으로 분산돼야 하고, 20세기형 대형 사무소 건축이나 공장에서 모여 일하는 방식도 크게 바뀌고 낮에는 오피스, 밤에는 이벤트나 식사 공간 등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 건축물이 나타나야 한다고도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혼공’에 기대어 사는 ‘얼로너’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낮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밤에 이벤트홀이 될 수 있을까? 한두 해 안에 대도시가 지방으로 분산될까? 그러나 지금은 실현될 수 없거나 실현되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상상을 쏟아 놓을 때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 동료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던 이전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 주변부터 배타적이고, 집 앞에는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꽃 하나 걸지 않으며, 가까운 길 위에 서로 나누어 쓸 장소는 만들 줄 모르면서 미래의 도시와 건축이 이러 저러하게 바뀔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 안에, 불특정한 많은 사람이 ‘일시적’이나마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일상의 공간과 장소를 조금이라도 많이 만들어야 함을 제대로 깨닫는 시간이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역설적이게도 지역사회를 밀도 있게 다시 구축하고, 원점에서 기술과 융합하는 인간 사회로 되돌아가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답은 개인이 멈출 수 있는 작은 환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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