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이나 뇌전증 등 기능성 뇌질환 수술은 ‘1㎜’의 오차 범위에서 성패가 갈린다. 미세한 혈관이 복잡하게 지나는 뇌 조직을 고려하면 수술이 정밀해야 뇌 손상 등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성 뇌질환 수술이 고도의 숙련된 의사가 아니면 다루기 어려운 분야로 꼽히는 이유다. 이처럼 까다로운 뇌수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의료용 로봇이 국내 강소기업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합작으로 상용화됐다. 로봇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으로 위상이 높아진 ‘K의료’의 주연으로 등장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밀 기술로 수술 부위 추적3D(3차원) 측정검사기술 전문업체인 고영테크놀러지는 세브란스병원과 손잡고 기능성 뇌질환 수술(정위기능 수술)을 돕는 의료용 로봇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상용화했다고 2일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은 고영테크놀러지가 2016년 개발한 뇌수술용 보조 로봇 ‘카이메로(KYMERO)’에 대해 진행한 약 2년간의 임상시험을 끝내고 오는 8월부터 수술에 본격 활용할 계획이다.
카이메로는 뇌수술 부위와 경로를 보여주는 ‘내비게이션 플랫폼’과 수술 부위를 정확히 가리키는 로봇 팔이 장착된 ‘자동입체 정위 시스템’ 등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장비로 찍은 환자의 뇌 사진이 내비게이션 플랫폼으로 전송되면 치명적 혈관을 피해 설정한 최적의 수술 부위와 경로가 화면에 뜬다. 동시에 수술대 위에선 스캐너가 환자의 머리를 측정해 수술 부위의 좌표를 산정한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입력된 정보 값과 수술대 위 환자 머리의 정보 값을 일치시켜 정확한 수술 부위와 경로를 찾아내는 게 카이메로의 핵심 기술이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화면에 비치는 가상의 공간과 실제 도로 상황의 정보를 일치시켜 경로의 오차 범위를 줄이는 원리와 비슷하다.
이어 수술대에 달린 로봇 팔이 레이저 빛과 연필 모양의 침습 도구를 통해 정확한 수술 부위와 경로를 가리킨다. 현재 대부분의 뇌수술에선 환자의 머리 부위에 큰 각도기 모양의 뇌 정위 수술기구를 부착한 뒤 수술 부위의 좌표를 측정하고 있다.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사장은 “로봇으로 정교하게 좌표를 측정하면 수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K의료 지원하는 로봇카이메로의 상용화는 미국 짐머바이오메트사의 ‘로사(ROSA)’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뇌수술용 보조 로봇은 일반 외과 수술용 로봇과 달리 고도의 정밀도가 요구되기 때문에 상용화가 어려운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로사는 2007년 현지 허가를 획득해 미국 병원에서 쓰이고 있다. 고 사장은 카이메로에 대해 “산업용 로봇 기반으로 제한된 환경에서만 정확한 좌표 추적이 가능한 경쟁사 제품에 비해 정밀도가 훨씬 뛰어난 제품”이라고 강조했다.
카이메로 개발이 시작된 건 2011년 산업통상자원부의 국책 과제를 고영테크놀러지가 맡으면서다. 2002년 설립된 고영테크놀러지는 3차원 측정검사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 전자제품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불량을 검출하는 자동화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다. 이 회사가 개발한 납 도포 검사장비는 세계 2500여 개 업체에서 쓰고 있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53%에 달한다. 지난 14년간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납 도포 검사장비에 쓰이는 3D 측정기술과 광학기술, 로봇기술 등의 원리가 카이메로 개발의 원천기술에도 적용됐다. 고영테크놀러지는 내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승인을 신청한 뒤 2022년 현지 진출에 나설 계획이다.
국내에서도 로봇이 일부 의료현장을 누비고 있다. 미래컴퍼니는 2008년 복강경 수술 로봇인 ‘레보아이’를 선보였다. 미국의 수술 로봇 ‘다빈치’가 20년 가까이 독점해온 복강경 수술 로봇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큐렉스는 척추 수술 로봇인 ‘큐비스-스파인’을 개발해 국내 허가를 받았다.
시장조사업체 윈터그린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수술용 로봇 시장 규모는 2016년 42억달러(약 5조1400억원)에서 2022년 130억달러(약 15조9000억원)로 커질 전망이다. 이 중 뇌수술용 로봇 시장은 현재 3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고영테크놀러지는 세계 뇌수술 로봇 시장에서 수천억원 규모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산학협력의 결실카이메로 상용화 성공에는 세브란스병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장진우 연세대 의과대학 신경외과 교수는 세브란스병원에서 2018년부터 카이메로 임상시험을 했다. 세계정위기능 신경외과학회(WSSFN) 학회장이기도 한 장 교수는 뇌정위기능 수술의 권위자로 꼽힌다. 그는 2년간 임상을 하면서 카이메로 정밀도의 오차범위를 0.98㎜로 좁혔다. 장 교수는 “카이메로 도입으로 국내 뇌수술 시간이 절반 정도로 단축될 뿐 아니라 정밀도도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국내 로봇 수술의 메카로 통한다. 2005년 미국에서 다빈치를 도입해 국내 처음으로 로봇 수술을 시작한 뒤 2018년엔 단일 의료기관으로는 세계 최초로 로봇 수술 2만 건을 달성했다.
이정선/윤희은 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