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택시업체들이 임금청구 소송전에 휩싸였다. 서울은 열 곳 중 일곱 곳이, 부산은 열 곳 중 아홉 곳이 고소장을 받았다. “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최저임금법에 보장된 임금을 받지 못했으니 돈을 더 달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17일 택시업계에 따르면 서울 경기 인천 부산 등 4개 지역의 법인택시업체 602곳 중 373곳이 임금청구 소송을 당했다. 전체 소송 건수는 476건이나 된다. 부산은 택시업체 96곳 중 87곳이 소송을 당했다. 서울에선 254개 업체 중 187개가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 금액은 택시기사 1인당 적게는 400만원, 많게는 3000만원에 달한다.
무더기 소송은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택시회사가 소정근로시간(취업규칙으로 정하는 근로시간)을 줄여 최저임금 지급을 회피한 행위는 불법”이란 판결이 나오면서 벌어졌다. 통상 법인택시기사의 임금은 기본급과 수당인 초과운송수입(매출에서 사납금을 제외한 금액)으로 이뤄진다. 2009년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최저임금 산정에서 초과운송수입이 제외되자 대부분 택시노사는 기본급 책정 기준이 되는 소정근로시간을 단축했다. 요금 인상 시기에 사납금을 동결하면서 초과운송수입이 늘자 근로자 측도 합의했다. 대법원이 이를 무효로 하는 판결을 내리자 택시기사들이 “최저임금과 실질임금의 차액을 달라”며 소송을 낸 것이다. 택시업계에서는 “업계 특수성을 고려해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이제 와서 돈을 더 달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코로나' 엎친데 '임금청구 소송' 덮쳤다…택시회사들 줄도산 위기
"돈 더 달라" 택시 기사들 소송 전국 확산서울에서 법인택시를 운영하는 이현순 대표(58)는 매일 밤 잠을 설친다. 잇달아 날아든 임금청구 고소장 때문이다. 법인택시를 상대로 한 임금청구 소송은 올 들어 확산 속도가 더 빨라졌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일단 소송을 걸고 보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이 상황을 이용해 ‘기획 소송’을 꾸리는 변호사도 늘고 있다. 택시업계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택시 매출도 줄어 택시회사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며 “소송전까지 겹치면서 법인택시 업계가 줄도산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이 소송 불붙여택시업계에 이른바 ‘임금청구 소송’ 불이 붙은 것은 2019년 4월이다. 당시 대법원은 경기 파주시의 거성운수 소속 택시기사 5명이 회사를 상대로 청구한 최저임금 소송에서 기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최저임금법 시행 후 기본급만으로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맞출 수 없었던 거성운수는 노사합의로 소정근로시간을 하루 8시간에서 6시간20분, 4시간으로 세 차례 변경했다. 대법원은 이를 최저임금 위반을 피하려 취업규칙을 변경한 것으로 보고 ‘무효’판정을 내렸다.
이 판결 후 임금을 더 달라는 택시기사들의 소송이 잇따랐다. 소송은 전국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다. 부산이 193건으로 가장 많고 경기(108건), 인천(100건), 서울(75건) 등도 ‘무더기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가액은 서울이 60억원을 훌쩍 넘고, 경기는 55억원을 웃돈다. 부산은 27억8367만원이다.
택시업계는 대법원의 판결은 노사 간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사실상 사납금을 인상하지 않는 대신 소정근로시간을 줄이기로 근로계약을 체결했다는 설명이다. 근로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 실제 소정근로시간만큼의 미지급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장성호 부산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은 “대법원 판례를 택시업계에 일률적으로 적용해선 안 된다”며 “사측의 일방적인 조정이 아니라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을 무조건 최저임금법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고통 호소하는 택시업계법인택시 대표들은 업계 생태계가 망가져 ‘줄도산’ 위기라고 아우성이다. 부산에선 패소 시 업체당 평균 20억원의 미지급금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서울에서 법인택시를 운영하는 한 대표는 “1년도 안 돼 열 번 넘게 법원을 들락날락했다”며 “변호사 선임 비용도 만만치 않고 관련 대응자료를 만드는 등 추가 업무로 본업을 제대로 챙기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동료 사장들 중에는 스트레스 위장병으로 병원을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인력난까지 발생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기사들이 ‘얼굴보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법인택시 대표들은 무더기 소송의 중심에 기획소송을 부추기는 소형로펌 변호사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심재천 동일운수(경기) 대표는 “변호사들이 택시기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소송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소송을 권유하고 있다”며 “업계가 난장판이 됐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확산으로 매출도 급감했다. 서울 법인택시의 월 매출은 작년 동기보다 4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택시기사 이모씨(64)는 “2월부터 수입이 3분의 1로 줄어 월 매출이 450만원에서 100만원가량이 됐다”며 “소송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택시업계 줄도산 우려택시업계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이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판결에 택시업계의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문충석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은 “대부분의 기사는 고정된 월급을 받는 것보다 자신이 운행한 만큼 추가 수입을 더 받기를 원한다”며 “노사가 도출한 합의를 뒤늦게 뒤집는 것은 사업장의 노사 안정성을 흔드는 행위”라고 말했다. 사납금 부담을 줄이거나 종전대로 유지하는 대신 소정근로시간을 조정하는 형태로 노사가 합의해 취업규칙을 정한 부분까지도 문제를 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법인택시 업계가 소송에서 불리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거성운수 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1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법리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택시기사 측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소송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면서 법인택시 업계가 크게 위축될 거란 예상도 나온다. 법인택시 회사는 2010년 1731곳에서 매년 줄어 지난달 말 기준으로 1670곳이다. 김태황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 노무상무는 “경기 침체로 영업 환경이 어려운 와중에 소송 부담까지 커졌다”며 “사업 포기를 고민하는 업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에선 반소를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인천시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인 한도섭 경진운수 대표는 “소송이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며 “법인택시업계 전체가 머리를 맞대 의견을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지은/최다은/이인혁 기자 jeong@hankyung.com